고향으로 떠나기 전, 내 손엔 6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들렸던 서점에서는 3권의 책을 샀고, 집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올 때는 책장에서 2권의 책을 또 뽑아 들었다. 그래서 11권의 책이 돌아오는 내내 내 곁에 붙어있었다. "그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래." 책들로 가득한 종이 봉투를 보며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은 누구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데요." 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고향까지 가는데 버스로 6시간이 걸렸고 난 그 시간 내내 책을 읽었다. 예전 같았으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금세 구토를 하고 말았을 테니. 하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난 차 안에서 책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미리 사들고 온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겼다. 차 안은 모든 것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나른한 오후의 학교 도서관처럼 차 안은 조용하였다. 꿈꾸는 듯한 버스의 내부. 움직이는 것은 창 옆에 올려놓은 내 볼펜과 의자 아래의 책들 뿐이었다. 볼펜은 차가 급정거 할 때마다 앞으로 밀려 움직였고 발 언저리에 세워둔 책들은 차가 급회전을 할 때마다 넘어지려는 시도를 했다. 그때마다 난 재빨리 움직였다. 정적은 방해받지 않았다.
고향에서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발한지 3시간 만에 난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이른 도착에 난 잠시 당황했다. 난 버스에 좀 더 앉아있고 싶었다. 이대로 어딘가로 움직이는 시간이 끝나버린다는 건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버스에, 아니 길가에 멈춰있고 싶었다. 하얀 김이 서린 창가를 손으로 한번 쓰윽 닦고는 먼 산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책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차는 너무나 일찍 도착했고 난, 내려야만 했다.
물론 난 알고 있었다. 그 많은 수의 책을 그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을 리는 없다는 것을. 책을 읽다가도 노트를 펴서 무언가를 적어야만 하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그걸 적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나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11권의 책을 들어야만 했다. 그건 나에겐 하나의 사명과도 같았다. 왜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이 한 권에 있을지도 모를, 내가 그동안 찾고 있었던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서라고 답해야만하는 무언가가 나에게는 있었다. 나에게 이 책들은 11권의 책이 아니라 5000쪽으로 된 한 권의 책과 같았다. 단지 그들은 11개로 보기 좋게 나뉘어 있었을 뿐이었다. "다 읽지도 못할 걸 뭐하러 들고다녀?" 오랫동안 들어왔던 질문이 다시금 들려왔다. 난 그때마다 했던 대답을 다시 들려주었다.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웃었다.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암에 걸린 한 여자와 그 어머니가 식구들과 어떻게 타자화 되는지를 그리고 있었다. '암이라고.' 난 생각했다. '평소 누가 암에 대해서 생각한단 말인가. 평소 누가 자신이, 자신의 가족이 암에 걸렸을 것을 가정하고 산단 말인가. 세상 어느 누가 항생제로 머리가 다 빠진 채 밤마다 구토하는 자신의 가족을 상상하며 산단 말인가.' 난 눈을 들어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 이미 도착한 줄 알았는데 난 여전히 길가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난 시야를 움직여 내 앞 경치를 쓱쓱 닦아 냈다. 먼 밤풍경과 지하철의 냉랭함이 드러났다. 난 여전히 길이었고 그들도 길가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언젠간 내려야만 했다. 종착지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삶은 5천 쪽으로 이루어진 책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다는 걸 알고, 그걸 다 읽는다는 게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난 시도해야만 했다. 오천 쪽에서 천 쪽만 찢어 가져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난 오늘도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방에 들어오니 히터로 열기가 따뜻했다. 오늘도 밤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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