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 책을 세계사를 다루는 일반적인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세계사 책과는 달랐는데, 저자는---제목에 나타나는 것처럼---시대별로 나타난 '지식'의 흐름에 중점을 두어 역사를 서술하고 있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한 전문가들과 자신의 평가를 적어놓고, 역사적 인물들의 그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고 또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는 어떻게 의견이 달랐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그때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른바 지식, 지식인을 세운다. 일반적인 세계사 책이라면 로마를 서술할 때 당연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중요하게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키케로를 중심에 세워두고 카이사르를 그 옆에 둔다. 로마인이 알았던 것, 로마인이 몰랐던 것이라는 다소 재미있는 주제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300페이지 초반에서부터 몇 십 쪽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는 '르네상스인'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곳 중 하나였다---사실 이 책의 저자는 르네상스인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책, 즉 한 가지 분야의 깊이있는 내용이 아닌 여러 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책을 읽을 만한 사람들이 바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르네상스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책일까? 저자가 책 속에서 말했듯, 이제 르네상스인은 그 존재가 말라버린 상태이고 따라서 지금의 현대사회에서는 이런---한정된 공간 안에 방대한 지식을 서술한---책이 그 홀로 가치를 지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난 저자가 자신의 책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줄 수도 있다: "1세기 전에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정식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혹시나 학교에 갈 수 있었다면, 읽고 쓰고 세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역사를 약간 배우고 외국어를 드문드문 배웠을 것이다. 심지어 철학도 약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배워서 뭐에다 써먹는단 말인가?" (813쪽) 그렇기에 단지 이 책은 다른 여러 지식을 위한 방향타로 그 역할을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심화된 전문분야로 향하는 다소 긴 인덱스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공부하는가라는 물음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수많은 '잉여' 지식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하는지, 또 해왔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래에는 이 책의 특징으로 볼만한 몇 가지의 문단을 남겼다.
'르네상스인'이라는 표현은 남녀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업적을 세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르네상스인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까지는 아니다. 다만 현대적 지식의 전체 스펙드럼에서도 오로지 작은 일부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해서 단지 조금씩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 용어는 본질적으로 아이로니컬한 것이, 이 용어의 진정한 의미에 상응하는 르네상스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식이란 워낙 복잡해진 까닭에 그 어떤 인간의 정신도 그 모두는커녕 상당 부분조차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315쪽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그런 일을 할 수 있기 위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즉 넓은 범위의 과학적 지식에서 "비판력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의 어느 한 영역에서의 전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비범한 주장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교육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현재의 우리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 319쪽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베이컨 역시 자신의 웅장한 계획 대부분을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내 생각에는 그 이유 역시 양쪽 모두가 똑같지 않나 싶다. 그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물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는 못했고, 모든 것에 전문가가 되려고 열망했던 것이다. 328쪽
교육을 받은 사람이 자기 분야 말고 더 많은 분야에 대해 "비판력이 있"어야 한다는 원래의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C.P.스노(1905~1980)가 지적한 바처럼, 훗날 대학의 분화된 세계는 서로 이야기하는 것조차 중단하게 되었다. '유니버시티'(university, 대학)의 '유니'(uni, 하나의)라는 접두사는 점차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 조직이 연구를 위한 정부자금을 점점 더 많이 소유하게 되면서부터, 지식과 진리를 위한 공동의 연구에 바쳐진 기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단절된 소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 대중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르네상스인'이란 표현은 때로는 감탄스럽고, 때로는 아이로니컬하고, 때로는 경멸적인 표현으로서, 이른바 한 가지 이상의 분야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용된다. 설령 그럴 경우라도 이 표현은 결코 원래의 뜻대로,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했던 의미로는 사용되지 못했다. 그 이상과 관념은 완전히 잊히고 만 것이다. 331~332쪽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바깥으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쪽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마 위에 올라타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으니, 왜냐하면 죽마 위에소더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다리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보좌라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339쪽
세르반테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방법의 발견에 있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현대의 시인이 이른바 "불가능한 꿈"이라고 부른 것을 추구했으니, 그것은 지상의 낙원에 있는 정의의 꿈이며, 실용적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용어상의 모순이다. 그런 꿈이 오로지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과연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와중에 실제 세계는 그 치명적이고도 무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데 말이다. / 세르반테스의 두 영웅은 정확히 무대의 전경 한가운데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거기서 약간 더 위에 있으니, 왜냐하면 그들의 발은 땅을 딛고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세계가 그런 영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직시한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광기에 불과했으리라. 349~350쪽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단순한 향수(일종의 부드럽고 순한 마약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독되지만 어디까지나 잠시 동안에 불과한 향수)와 아주 오래 전의 삶의 방식(가령 돈이 아주 중요하지는 않았던 시절의 방식)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을 항상 신중히 구분해야만 한다. '더 간단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자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소수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돈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손빨래를 해야 하고, 농작물을 직접 길러야 하고, 어디 가려면 걷거나 말을 타야만 하는 살밍라고 해서 진정으로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는 충분히 현명하다. 과거에만 해도 전혀 없었던 스트레스, 불안, 갖가지 위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현대의삶은 과거의 삶과는 달리 훨씬 더 단순하고 편안한 것이 사실이다. 587쪽
하지만 대폭발 이론을 접하고 나서, 나는 문득 사물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비록 아름다운 수학적 세부 사항까지 망라해가면서 그 사건을 서술할 수 있지만, 과연 우리는 그 사건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게 이치에 닿게나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그 근본에서부터 과연 이치에 닿기나 하는 것일까? 741쪽
나는 '미디어 때문에' 우리가 조부모 세대보다도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준비까지 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미디어 때문에' 우리가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우리가 더 나아졌는지, 또는 더 나빠졌는지, 나로선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자연적 노예의 박멸을 제외한다면, 도덕적 진보는 항상 극도로 모호하기 짝이 없으며, 21세기를 맞이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8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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