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뒤에 있는 문학평론가의 말마따나 이 책은 여러가지 문학적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숭고한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은 생각해보게 만드는 점이 있다. 그러나 소설은 철학책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이 책이 소설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에게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자살안내자가 이끄는 두 인물들의 자살 과정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지닌 성격의 특이성이 등장인물들간에 서로 격리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있는 독자와도 유리되어 있어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켰다.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등장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하는데,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 그들이 이르는 자살의 과정도 그다지 충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인물들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그런 점은 해석의 재미를 부여해줄지는 모르나---적어도 내 관점에서는---소설의 재미를 반감시켰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비현실성이 이 작품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 말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같은 소재를 삼류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사르다나팔이 자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책 158쪽) 멸망을 앞둔 바빌로니아의 사르다나팔 왕은 자신의 애매와 애첩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그런 광적인 모습을 소설 속 화자는 비범하게 생각하며 그런 묘사야말로 그 작품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고 간주한다. 그런 화자의 모습은 이 작품 전반에 깔린 분위기와도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의 보편적 감성을 다룸과 동시에 우리의 일시적 혼돈을 구원해주는 작품이 문학사에 길이 남고 또 찬사받아왔음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이 당시의 충격과 화제를 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글이 될지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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