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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은 바뀐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익숙한 길

by solutus 2011. 11. 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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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에 들러 책장을 살펴 보던 중 유난히 색이 바랜 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 책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책장을 두꺼운 재질의 천으로 가려둔 상태였지만 종이가 변색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책은 유난히 색이 바래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산, 비슷한 재질의 다른 종이책들보다도 더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왜 이것만 유달리 색이 변했을까.' 난 의문이 들었다.

난 책의 종이가 바래는 게 싫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던 시절 집에 있었던 색바랜 책들의 기억 때문이었다. 난 그 책들이 싫었다. 그 책들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냄새와 그 책의 종이를 만지고 나면 나타나던 가려움 증상 탓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랜 종이처럼 그 책들의 내용도 낡아빠진 내용일 것만 같아서 난 그 책들을 싫어했다.

그런데 난 시간이 지나도 그 때의 그 감정을 잊지 못했다. 그건 내가 좋아서 산 책들도 언젠간 그렇게 색이 변해버릴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내 책들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구닥다리 취급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다. 그래서 난 내 책들이 변색되지 않길 바랐다. 난 부모님의 책을 그저 구시대의 지나간 책들처럼 여겼지만, 나는---어쩌면 내 자식이---내 책들을 그렇게 구닥다리 취급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구입한지 5, 6년, 심지어 10년이 넘은 책들은 이미 색이 변해버렸다. 언제나 책을 깨끗히 보려고 유난을 떨었지만 종이의 산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걸 떠올리자 아무리 알려주어도 피해갈 수 없는, 누구나 거쳐야만하는 감정의 답습이 예언처럼 눈앞에 펼쳐져버렸다.

난 오늘 일부러 그 심하게 변색된 책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 이상하게도 그 오래된 책을 펼쳐보고 싶었다. 보급판으로 만들어진 그 책은 유달리 불그스름하였다. 자신이 마치 녹슨 철이기라고 한 것처럼. 책을 펼쳐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매캐한 냄새와 따끔거리는 가려움이 부모님의 그 오래전 책에서 날아와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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