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며 "이건 나잖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를 나 자신이라고 여기기보단 그저 우연히 닮은 사람으로 본다. 신기하게도 아주 쏙 빼닮은 사람. 하지만 이 책 <도플갱어>의 주인공,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우연히 자신과 닮은 사람을 보았을 때 "저건 나잖아."(27쪽)라고 말한다. 그 시점에서 나에게 놀라웠던 점은, 세상에 나와 동일한 인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의 관점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특이한 생각을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인공이 보이는 우울증은 그런 점을 자연스럽게 넘기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느리다. 이 또한 주인공의 성격과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주인공이 자신과 닮은 한 남자를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 장면이 나오는 건 책 초반(30쪽)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그 사람이 출현한 다른 영화를 찾아보다가 그 사람에 대한 정보(전화번호, 사는 곳 등)를 알아내기 위해 영화사에 편지를 보내는 데까지 약 140쪽이 소요된다. 책의 약 2/5 정도 되는 지점이다. 어떤 작가는 단 한 페이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는 쉽게 흐름을 내보내지 않는다.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가 자신의 도플갱어가 등장하는 비디오를 빌려보는 장면에 몇 십 페이지를 할애하고, 아폰소의 애인이 등장하는 장면에 몇 십 페이지를 할애하며, 주인공에게 비디오를 보라고 권했던 교사와의 대화에 몇 십 페이지를 할애한다. 전화번호부에서 도플갱어의 이름을 찾아 전화하는 것에 또 몇 십 페이지를 할애하고,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 마지막 몇 십 페이지를 할애한다. 사라마구는 왜 이렇게 느린 전개를 보였을까? (내가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난 보르헤스의 금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책 <도플갱어>도 주제 사라마구의 또 다른 소설인 <예수복음>처럼 화자의 위치가 상당히 독특하다. 화자는 마치 영화를 보면서 해설을 하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때로는 교수처럼, 때로는 단순 내레이터처럼 우리에게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의 반응을 전달한다. 심지어 "이런 소설을 읽을 때"라는 말을 하여, 우리가 명백히 소설을 읽고 있으며, 화자가 바로 그런 독자의 동료라는 의식을 심어준다. 화자는 소설 밖으로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만약 우리가 그에게 방금 본 영화가 무엇인지 직접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면, 그는 아마 성난 시선으로 우리를 쏘아보았을 것이다. 뻔뻔스러운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그런 시선 말이다." (118쪽)
이런 방식은 꽤 독특한데, 그가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 궁금했다. 그런 방식이 이 소설에 어떤 효과를 일으켰을까?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방식의 서술을 했더라면 이 책의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단편소설이라면 단순한 서술로 넘어갔을 상황을 길게 묘사한다: '한 여자가 일어서서 의자에 앉아있는 한 남자의 곁을 지나간다. 여자가 남자의 곁에 잠시 섰을 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 둘은 살짝 포옹했다가 떨어진다. 둘은 서로를 어색하게 마주보며 미소짓는다.' 이렇게 단 두 줄로 표현할 수도 있는 상황을 주제 사라마구는 약 한 페이지에 걸쳐 묘사한다. 이런 형식의 서술은 책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런 형식이 그가 글을 이끌어 가는데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쉽게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왜 그는 느림동작을 지켜보듯 세세히 나열했을까?
그 외에도 여러 궁금증이 일어났다. 역사교사인 주인공이 역사를 가리키는 순서를 현재에서 과거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유, 주인공과 도플갱어의 직업이 암시하는 것(역사교사와 남을 행세해야하는 영화배우), 마지막의 열린 결말(또 다른 도플갱어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 등은 한번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일어난 신기한 사건(실화)을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해 말 아나이스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너랑 똑같이 생긴 미국 배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혹시 언니나 동생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다. 아나이스는 친구들이 얘기했던 '게이샤의 추억' '21 앤드 오버' 등의 영화를 찾아봤다. 정말 자신이 연기하는 듯 똑같은 얼굴의 배우가 나타났다.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서맨사 푸터먼, 1987년 11월 19일 출생, 한국에서 입양…. 아나이스의 눈과 몸이 굳었다. 생년월일이 같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입양된 사실까지도 일치했다." 앞의 인용문은 어릴 적에 미국와 영국으로 각각 입양된 쌍둥이에 관한 일화의 일부이다. 꼭 이 소설, <도플갱어>의 전개와 일치한다. <백년의 고독>에 나왔던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가 실제로도 있었던 것처럼, 이런 일화들은 소설이 가지는 개연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아닐까 싶다. 실화와 소설의 주인공들이 맞게 된 정반대의 결말도 흥미롭게 지켜볼만 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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