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던 것이 갑자기 대단한 것으로 뛰어오를 때가 있다. 아쉽게도 이것은 대개 능동적인 반응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이 대단하게 봐주고 거기에 뛰어난 가치를 부여하니, 처음에는 미심쩍어 하다가 주변의 환호가 커지면 같이 동조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개념이든, 세상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존재들은 대개 그런 대동소이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앙리 마티스나 한스 아르퉁의 작품들을 이름을 가린 채 전시하였을 때 그들의 작품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할 일반인들은 지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주방장이 아닌, 굳이 외래명인 쉐프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요리사들이 최근에 인기를 끄는 이유나 가수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댄서들이 오늘날 각광받게 된 것,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말도 꺼내지 못했을 이혼이라는 이야기가 '돌아온 싱글'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로 변하게 된 것도 다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처음의 강한 저항이 어떤 식으로든 주변의 인정을 받아 누그러지게 되었고, 그것이 책, 신문, 특히 TV 같은 대중매체를 통하여 일반화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이다. 거부감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그것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제 그것은 대단한 신화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하찮게 여겨지던 것이 대단한 것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소수의 중요한 인물들이 그 하찮은 것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시작된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로든 아니면 자신의 막대한 돈으로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극찬을 하자 국내에서 대단한 선풍을 끌게 되었고, 수집가들이 유성 파편을 엄청난 가격으로 사들이자 유성 붐이 일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들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의 극찬 아래 초현실주의나 모더니즘의 현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화가들의 그림은 어떤가. 얼마 전 앤디 워홀이 그린 1달러 지폐가 366억원이라는 가격에 낙찰된 것이 대표적이다. 중요한 인물들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가치가 없을 것들이 그들 덕분에 대단한 가치를 누리고 있다.
이런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에 이도다완이 있다. 다른 일반적인 도기와 섞어두면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이 도기들은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되면서 국내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나 중국에 남았다면 진작에 바닥에 던져져 박살났을지도 모를 이 못생긴 막사발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대단한 작품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이도다완에는 기자에몬이 있다.
우리는 너무나도 평범하여 쳐다보지도 않던 것들이 일본에서 인정을, 그것도 이미 16세기에 오사카 성과도 안 바꾸겠다는 대단한 인정을 받더니 결국 국보에까지 지정되었다. 먼저 일본이 가치를 부여하고, 이제 세계가 알아보고 극찬하니 그제야 그것이 우리의 것이였다며 억울해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을 누렸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 가치를 알아본 것은 일본인이었고, 그 가치를 대단하게 올려놓은 것도 일본인이었다.
이도다완이 실은 우리의 문화라고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도기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추정만 할 뿐이다. 그 대단한 것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에 대한 대중적 인식 또한 별 볼 일 없다. 아무리 손재주가 있다고 한들, 대학교를 포기하고 도공이 되겠다는 자식에게 그렇게 하라고 응원해줄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도공들이 TV에 나와 도예쇼를 선보이고 예능에 나오면서 선풍적인, 아주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 어쩌면 그때는 조금 가능성이, 정말 조금 열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 많이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는 사람들보다는 누군가 이미 부여한 가치에 쓸려 다니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보니 장인이 태어날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이미 대중적으로 인정받은 일이 아니면 감히 시키려고 하지도, 응원해 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방법은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을 믿는 수밖에는 없다. 조선시대의 한 도공이 이조 막사발을 들어올리며, 자신은 미래 언젠가 국보로 지정될 예술품을 만들고 있다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그런 건 나도 만들겠다!" 혹은 "그런 건 나도 그리겠다!" 하지만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예술가라면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대중의 인정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