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이타적이라거나 사랑을 할 줄 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자신감 형성을 위한 차원에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편협한 시각에서 머물 경우 오직 그 자신만이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틀에 갖혀있다.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나 국가, 환경이라는 거대한 틀에서 볼 때에도 이러한 일은 무척 비일비재하다.
가령 명절을 맞이하여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가는 경우를 보자. 이 사람은 고양이를 집에 혼자 두는 것보다는 함께 고향에 가는 것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고양이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고양이 역시 혼자 있는 것보단 자신을 데려가 주는 걸 좋아한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 경우 고양이 주인은 스스로를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며 동물을 집에 내버려두는 사람들보다 심성이 뛰어나고, 거기에 더하여 자신을 박애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뜻밖의 문제에 부딪힌다. 고향의 가족들이 고양이 털이 많이 날린다며 고양이를 가져온 일을 마땅치 않아 하는 것이다.
이때 스스로를 이타적이며 사랑을 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자신과는 다른 사람, 즉 동물을 사랑할 줄 모르고 윤리의식이 낮은 사람들로 치부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사랑을 할 줄 안다면 동물의 털쯤은 문제삼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모르고 따라서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 털에만 관심을 집중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 여전히 사랑을 아는 관대한 인물인 반면, 그의 가족들은 그가 윤리적 계몽을 해야 하는 다소 미개한 상대로 규정된다.
사랑을 강하게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 또한 쉽게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사랑을 말하고, 따라서 자신이 다른 이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랑과 도덕은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치우친다. 위의 예시에서 보자면 그의 사랑은 오직 고양이라는 동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양이의 털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은 그의 사랑이 포용해야 할 범위에서 쉽게 배제된다. 만일 그가 가족들의 털 문제를 해소시켜 줄 방안을 미리 마련했었다면(가령 청소를 매일 깔끔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던지, 고양이의 몸을 옷으로 최대한 덮어서 털이 날리는 문제를 완화하겠다던지) 그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그러기보다 마냥, 나처럼 당신들도 이 동물을 그저 사랑해야한다고 강요하는 것에 그친다. 따라서 상대방이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면 그 상대방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게 된다.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지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사랑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 앞에 얼마든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그 수식어 중 대표적인 것이 '이기적인'이다. 사랑은 사랑이되 이기적인 사랑. 우리는 사랑이 마치 '사랑' 그 자체로 완벽한 것으로 가정한다. "이건 사랑이야. 그렇기 때문에 정당해." 하지만 우리가 겪는 사랑에 관한 많은 문제는---종교든, 사회든, 가족이든---대개 자기 편의식의 일방적 가정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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