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비평가들 사이에서, 비평이란 객관적인 사실들의 나열이라는 믿음이 있는 듯하다. 그 믿음은 비평이--특히 과학적 비평의 경우---철학이나 심리학, 역사, 종교, 사상과 같은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진술된다는 논리에서 시작한다. 그렇지 않은 비평, 예를 들어 자신의 주관적인 인상이 들어간 비평은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것으로 폄하된다. 그런 믿음은---솔로몬 피시맨이 "미술의 해석"에서 월터 페이퍼에 대해 쓴 바와 같이---문학적 능력이 비평하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 "그의 미술 비평은 (...) 문필가의 시각적 감수성의 결과물을 언어화하는 데 필요한 재능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미술의 해석(학고재, 1999), 71쪽)
비평을 객관화하고 감수성을 배제하여 문학계에 확고부동한 지위를 세우려는 의도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럴 경우---비평이 온전히 객관적이다라는 믿음과, 과학철학으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고 있는 있는 과학의 객관성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그냥 넘어간다 하더라도---비평가들이 스스로 내세운 자신들의 위치, 즉 비평가란 관람자와 작가 사이에서 그들을 연결해주는 중개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만은 폐기해야만 한다.
만일 인상 비평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비평가 혹은 비평은 더 이상 관람자와 작가 사이의 중개자가 아니라 작가 옆에 별도로 존재하는 기구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관람자들은 거의 대부분 아마추어다. 즉 어떤 접근 방식으로 쓰였든, 그 비평이 아마추어 관람자에게 이해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비평을 쓰는 비평가들은 관람자와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집단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의 비평은 관람자들에게도, 심지어 그들이 비평한 작가들에게조차 이해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상태에서 인상 비평에 대한 배격은 그들을 예술비평이 전무한 시대로, 기껏해야 채색 기법과 같은 전문적인 논문이나 작가들에 대한 전기가 예술작품에 대한 부연 설명의 전부였던 19세기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고, 심지어 그들을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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