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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한 무관심이라는 사랑의 전략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1. 12. 8.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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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흔히 듣는 조언ㅡ특히 여자 쪽에서 많이 듣게 되는ㅡ중 하나는 상대방에게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가 무언가를 해주길 속으로 기대하지 말고, 원하는 바를 그냥 이야기하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것이다.

이런 조언이 빈번하게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계속 그런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이ㅡ꼭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더라도ㅡ어떤 요구를 직접적으로 하기 전에 그 행위를 먼저 해주길 원한다. 내가 '자, 이제 나에게 고마워해 줘'라고 말하고 나서야 고맙다고 말하는 상대, 혹은 '자, 이제 나에게 미안하다고 해 줘'라고 말해야 비로소 미안해 하는 상대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가 직접적으로 요구해야 비로소 무언가를 한다면, 당장 만족스러울 수는 있어도 진심으로 한 행위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이 앙금처럼 남기 때문이다.

영화 <브레이크업-이별후애>에서 빈스 본은 자신은 독심술사가 아니니 돌려서 말하지 말라고 제니퍼 애니스톤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제니퍼 애니스톤은 그의 그런 요구가 못마땅하다. 그녀는 그에게 '설거지를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기꺼이 나서서 설거지를 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는 설거지를 도와달라고 요구해야 마지못해 일어선다. 그녀는 그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반면 빈스 본은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는데도 언짢아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설거지를 '기꺼이' 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중요한 건 하기 싫은 데도 실제로 하는 것 아닌가?

남녀의 갈등 상황으로 흔히 나오는 설정이지만 난 이런 상황이 꼭 특정 성별에 국한된 심리적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기 전에 기꺼이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남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심리적 기대는 남녀를 따지지 않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에게 원하는 바를 정확히 요구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면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조언이 계속 이어진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교양과 연관 지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내가 원한 건 단지 내가 원한 걸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것이다. 나는 단지 당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당신의 욕망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것은 내가 원하는 걸 하지 않는 것보다 원치 않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교양으로 이끈다. 교양 있는 행동은 정확히 타인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 듯이 행동하는 것, 그래서 나의 복종이 그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2010, 34~35)

무언가를 시켜야 비로소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무관심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른바 정중한 무관심이다. 빈스 본이 거실에서 비디오 게임을 할 때, 그는 제니퍼 애니스톤에게 어떤 적의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상황에 집중했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했을 뿐이다. 그는 피곤하니까 마사지를 해달라거나, 기분이 좋아지게 웃기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식의 어떤 욕망을 제니퍼 애니스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름의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제니퍼 애니스톤은 그의 그런 태도에서 오히려 잔인한 무관심을 발견한다. 설거지를 해달라고하자 못마땅한 태도로 일어서는 그에게서 자신을 이런저런 불쾌한 요구나 해대는 사람으로 만드는 압력을 발견한다.

결국 제니퍼 애니스톤은 자신의 불쾌한 태도가 바로 빈스 본 때문이라고 믿는다. 특히 그가 '알아서' 잘 했다면 그녀가 잊고 지냈던,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윤리적 문제ㅡ내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건 아닐까?ㅡ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정중한 태도는 그래서 실패한다. 우리는 '너를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무관심을 정중한 태도 속에 감춘다고 믿는다. 우리는ㅡ서로가 서로에게ㅡ우리가 모른 체 하고 싶어 했던, 잊고 싶어 했으며 실제로 잊고 있던 무관심을 '발견'한다. 우리가 목격한 것ㅡ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 우리가 먹기 위해 도축되는 소와 돼지 들ㅡ을 잊어버린 뒤에야 보편적 윤리를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감추고 싶은 걸 실제로 잊어버리고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획득하고자 한다. 제니퍼 애니스톤은 자신의 요구가 상대방의 심리를 지배하려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의심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이상화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상, 꿈ㅡ어쩌면 환상ㅡ은 언제나 잡음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원하는 바를 직접 말하고 그에 만족하라는 조언은 우리 앞에 가로 놓인 장애물을 명확하게 가리킨다. 우리는 그 장애물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거기서 멈추고 만족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조언은 관계에 암울한 전망을 비춘다. 결국 그것뿐인 관계라면 애초에 맺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미디어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전문가는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 갈등을 겪는 연인, 자녀와 다툼이 잦은 부모에게 그 현실을 인정하라고 주장했고 이는 즉각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을 인간이 부여한 인간적인 한계로 끌어내렸다. 이제 상대방에게 바랄 수 있는 정당한 요구조차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을 침해하려는 은밀한 공작 행위가 아닌지 의심 받게 되었다.

오래전에, 사람들은 자신이 호의를 베푸는 것인데도 의무인 척하는 것을 교양으로 여겼다. 이제 그런 식의 교양은 단순한 자기 과시 혹은 타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간주된다. 오늘날의 교양은 자신의 의무인데도 누군가 원하면 상황에 따라 호의를 베푸는 척하는 정중한 태도를 규범으로 삼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내부에서 우리는 무관심이라는, 그런 관계는 결국 헛되다는, 그래서 사랑보다 돈을 선택하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사랑의 끊임없는 적의를 발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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