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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잡음이라는 비선형성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21. 7. 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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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보다 좀 더 고상한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ㅡ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

 

 

1. 

<블랙 스완>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다루는 책은 아니다. 책의 제목이자 중요 개념인 <블랙 스완>은 하얀 백조의 세계에 불현듯 나타나는 검은 백조와 그것이 일으키는 영향을 가리키는데, 이 개념은 카오스 이론과 프랙탈 이론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 저자는 검은 백조가 나타나는 이유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예방 행위에는 보상을 잘 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 성향을 예로 들었는데, 이 역시 오래전에 제시됐던 것들이다. 확증편향과 귀납법의 오류를 다루는 책은 (저자가 버트런드 러셀의 비유를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인용한 것이 예증하듯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유행하는 책이 아니라 최고의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조언은 이탈로 칼비노와 에라스무스를 넘어 최소한 쿠인틸리아누스까지 올라가고, 책으로 가득한 방을 혐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찰은 움베르토 에코나 피에르 바야르 같은 현대 작가를 넘어 못해도 세네카까지는 올라간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 즉 우리가 기억을 상황에 따라 조작한다는 저자의 말은 (검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이미 프로이트가 여러 차례 제시한 바 있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그래서 난 이 책의 가치를 집대성에 둔다. 

 

그렇다고 옛글을 잘 모아둔 책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의 기반 중 하나인 '정규분포'를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거대한 지적 사기'로 칭한 점을 흥미로운 예시로 들 만하다. 물론 이 예시 역시 '평온한 상태에선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는 오랜 격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정규분포 안에 있다는 건 내가 심리적으로 평온한 상태 (내 주변에 하얀 백조만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곧 평상시에 본 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오판할(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맥락이 같다. 정규 분포를 '사기'로 규정한 저자의 글과 사람을 알아보려거든 힘든 일을 같이해보라는 옛 격언은 단어만 바뀌었을 뿐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도 여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이론들, 특히 현대 경제학의 거장인 폴 새뮤엘슨의 저작을 사기 행위로 묘사한 것은 과감하다.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도  '순수하고 완전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장'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모형으로 한 경제 예측은 실제와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지만,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처럼 '사기'라는 강경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표준정규분포모형으로는 1987년의 블랙 먼데이, '검은 월요일'을 예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지금도 전문 투자자들 대부분이 따르고 있는 표준정규분포모형은 주식 시장이 20% 넘게 주저앉을 가능성을 10만분의 1보다도 작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단 하룻만에 주가가 폭락했다. 

 

그럼 정규분포를 사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이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미래를 잘 맞춰왔더라도 단 한 번의 대폭락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그를 대중보다 못하다고, 전문가란 그럴싸한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다고 단언한다. 그는 정규분포라는 뻔한 상황을 기반으로 하는 전문가들의 예측은 점성술사의 예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하긴, 점성술사도 오래전엔 전문가 대접을 받았다.

 

이 책의 논의를 다양한 방면으로 확대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에게 가장 민감하고 예리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역시 경제와 관련된 것일 테다. 정부 관계자, 경제학자, 전문 투자자들은 온갖 확률과 통계 모형으로 시장(주식 시장이든 부동산 시장이든)을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하다고 믿고 위험관리를 통해 대규모 손실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순수한 이론과는 달리, 회사는 수익률을 조작하고, 위험이 없다고 홍보하고 은폐하며, 손실을 가장한 비자금을 조성한다. 최근 대한민국의 부동산 시장은 어떠했는가. 정부의 의도는 반대의 결과를 내놓았고, LH 사태는 전문가들이 무얼 예측하지 못했는지를 명백히 드러냈다. 대학 교수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이런 내막, 즉 검은 백조를 예상하지 않고, 예상할 줄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껏 시장에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파국을 단 한 번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미래가 온통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고 했던 뉴턴식 세계관이 완전히 무너진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검은 백조가 상대성인 문제임을 놓치지 않는다. 검은 백조는 뭘 모르는 '젖먹이'들에게 나타난다. 우리가 전문가를 자처하며 그쯤은 다 안다고 우쭐해져 있을 때, 우리는 젖먹이가 된다.

 

 

2.

이 책을 읽어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까? 회의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책은 결국 이런 부류의 생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읽는다. 이미 수천 년의 역사가 증명한 일이다.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건, 그것이 고쳐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방증이다. 엉터리로 청소하는 사람에게 청소하는 법을 알려주면 좋을 것 같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그걸 간섭이라고 부르며 무시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강아지가 집안 바닥에 싼 변을 치우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물티슈를 꺼내 바닥을 쓱쓱 문지르고는 그걸로 청소를 끝냈다. 물티슈에 살균 성분이 있어서 그 정도로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면역 체계를 위해선 적당히 더러운 게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칼 세이건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려운 이유로 배경지식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도 그런 경우다. 강아지의 변에 관한 대화로 난 그와 나 사이에 청소의 개념뿐만 아니라 화학물질과 면역물질에 관한 개념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조언'을 하면 그는 계속 '왜'라는 질문을 던질 것인데, 그 질문은 새로운 지식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존 지식을 정당화하고 싶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라는 질문에는 이미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벽이 세워져 있어서 어느 선에서 멈추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우리는 하얀 백조로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지, 굳이 검은 백조를 가정하지 않는다.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그저 방관해야 할까? 한번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주변을 살펴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대화한 적이 있다. 차가 다니는 도로 신호등은 빨간불일 게 분명하고 그 신호에 따라 차가 멈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굳이 고개를 돌려 주변의 차를 살펴볼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주변의 차를 살피는 것은 그에게 과잉과 강박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검은 백조, 즉 졸음운전을 하거나 딴짓을 하거나 횡단보도를 빠르게 지나갈 욕심으로 오히려 속도를 높이며 다가올 운전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난 그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그는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가 태도를 쉽게 바꾸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그는 수십 년간 그렇게 살아왔고, 그간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그래서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는 하얀 백조의 세계에 산다. 검은 백조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예방의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는 불쾌함을 느낄 테고 다쳤을 때 치료해주는 사람에게는 큰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누구나 그렇다. 하지만 난 방임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렇게 치명적인 사고와 연관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래서 난 입을 열었다. 이 책을 쓴 저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3.

저자는 <블랙 스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모순을 고백했다. 이야기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인간의 속성을 지적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자신 역시 이야기의 방식을 사용했다고 말이다.

 

사실 저자는 더 많은 고백을 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곳에 과장법을 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오늘날 검은 백조가 출현하는 영역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번 나타나면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그 검은 백조(자동차, 비행기, 주식, 대량 살상 무기, 전염병, 기후 변화 등)가 분명 '원시 시대'에 비해 늘어나기는 했지만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만일 검은 백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우리는 삶을 정상적으로 지속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내전이 지속되었던 레바논에서의 불안정한 삶이 그에게 그런 시각을 심어준 것일까? 물론 저자는 내 이런 생각을 이야기 짓기의 오류로 규정하며 성장 배경이 오히려 그 사람을 잘못 판단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분명한 건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고 있을 독자는 특히 더 그렇다. 따라서 검은 백조가 과거에 비해 무한정 늘어났다고 이야기하기는 매우 어렵다.

 

테러보다 자연자해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은데도 사람들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테러리즘을 걱정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어떨까? 우선 사람들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테러를 더 걱정하고 그에 공분한다는 저자의 가정도 잘못되어 보인다. 저자는 태풍과 쓰나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과 911 테러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의 경중을 어떻게 측정한 것일까? 무엇보다 저자는 잘못의 경중을 따질 때 '의도'를 중시하는 우리의 태도를 무시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 잘못이 실수나 우연 때문인지 아니면 고의로 한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이 달라지는데도 저자는 그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이 검은 백조를 주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 강조했으면서도 카지노에 나타날 수 있는 검은 백조의 존재는 간과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카지노는 평균의 왕국에 속하는 곳으로 '거의 파악할 수 있는 확률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곳에서는 검은 백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영화 <21>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혹은 (저자의 주장대로) 사기 도박이 카지노에 입히는 손실은 다른 '검은 백조'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이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무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저자의 입장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을 하나 들자면 저자가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을 언급하며 그 소설에서 나타난 출판사와 비평가의 허위를 지적하는 데에만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 피에르 바야르가 같은 소설을 분석하면서 비평가의 임무를 긍정적으로 역설한 것과 비교된다. 일반적인 시각에선 나심의 지적이 더 타당하지만, <블랙 스완>에서 '인식의 한계'를 다뤘던 그였기에 발자크의 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나도 한 가지를 고백해야겠다. 검은 백조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는 사람 역시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만 그런 염려를 한다고 말이다. 앞선 횡단보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횡단보도에선 부주의했지만, 어린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유괴'라는 검은 백조만큼은 염려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유괴라는 검은 백조를 터무니없는 일로 일축했다. 확률로 보면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더 가능성이 없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말이다. 그렇다면 보행자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졸음운전 하는 차량에 내가 치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유괴 확률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있을까? 그 희박한 확률을 두고 높고 낮음을 따지며 서로 다투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관심 분야에 집중하며,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편협한 세계를 살아간다. 이건 <블랙 스완>을 쓴 저자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래도 우리에겐 엉킨 실타래를 푸는 힘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 힘에 동경의 힘을 담아 '지혜'라 부르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쩔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지혜는 아이러니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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