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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대로 보기, 보는 대로 믿기

생각이라는 말벌

by solutus 2021. 4. 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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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되었던 영화 <미나리>에서 한 미국인이 다우징으로 수맥을 찾는 모습이 나왔다. 아내는 이 장면에서 다소 놀라며 서양에서도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다우징으로 수맥을 찾는 건 동양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난 다우징이 서양에서 시작되었다고 일러주었는데 아내는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우리에게 서양이 과학과 이성이라는 합리적 체계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서양 역시 미신으로 쌓은 토대가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점성술과 연금술이 널리 알려진 대표적 사례이다. 다우징을 이용한 수맥 탐사는 최소 400년 전에 유럽에 자리를 잡았다. 기원은 더 오래되었다. <어제까지의 세계>를 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우징이 기원전의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놀라워했다. 다우징으로 수맥을 찾는 일은 무작위로 우물을 파는 것과 거의 똑같은 확률을 지녔음에도 지금도 이를 믿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믿고자 하는 모델의 성공 사례만 기억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싫어하는 모델은 실패 사례 위주로 기억한다.

 

그런데 특정 사례를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애초에 다양한 사례를 접하며 사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방금 전에 겪은 생생한 경험을ㅡ예컨대 다우징으로 수맥을 찾다가 처음 땅을 팠는데 정말 물이 나왔다ㅡ항상 참인 진실로 오인하게끔 만드는 현상이다. 다우징이 우연인지 아닌지 알아내려면 물을 찾아낸 이후에도 다른 수맥을 찾아나서야 한다. 하지만 첫 시도 만에 물이 나오면 다우징은 확실한 방법으로 선언되고 그것으로 증명은 끝이 난다. 내가 동전 던지기를 하며 '앞면'을 외쳤는데 정말 앞면이 나오자 나를 예언자로 모시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생하게 경험한 것에, 심지어 다른 이가 생생하게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차를 사려고 몇 달 동안 다양한 모델과 여러 옵션을 고민한 끝에 차종을 결정했음에도 옆집 남자가 그가 사려고 했던 차와 똑같은 차를 몰고 와서 차가 고장 났다며 욕을 하면 그 차를 사려 했던 결정을 망설이는 것이다.

 

이런 생생함 효과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시각 매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매체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을 잘 구별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악당 역할을 한 배우를 실제 악당으로 여기고, 소설에 등장하는 '나'를 소설가 그 자신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언젠가 몇몇 언론은 만화가 기안84가 자신의 웹툰에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난하는 캐릭터를 등장시키자 기안84가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반대했다는 기사를 반복적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난한 건 웹툰 속의 특정 캐릭터였지 기안84가 아니었다. 하지만 언론은ㅡ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ㅡ그가 만든 캐릭터에 작가 본인을 투영시켰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애거서 크리스티는 계획적인 살인자와 명탐정 사이를 오가며 정신분열증을 겪는 환자라고 해야 할 테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판했다가 독자에게 많은 항의성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움베르토 에코가 그리스도를 비난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는 복음 속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화 속 그리스도를 풍자했을 뿐이었다. 이를 두고 에코는 그들이 "예수를 연기한 배우가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예수를 영화에서 보았다"라고 비판했다. 어쩌면 그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모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가 어떻게 한탄하건 간에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던 게 갑자기 변할 리는 없다. 우리 대다수는 앞으로도 우리가 본 것을 그대로 믿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과거 <다빈치 코드>가 영화화되었을 때 기독교계에서 유감을 표명하고 영화 상영을 반대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명민한 관객은 <다빈치 코드>가 허구에 기반한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아무리 작가 댄 브라운이 "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라고 주장하더라도 그 발언을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일종의 기법, 게임의 일부로 이해할 것이다. 영화 내용이 완전히 허구임에도 영화 도입부에 '이 영화는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라는 서술을 달아 독자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것과 비슷하다. 이 게임에 익숙한 시청자는 이를 쉽게 알아챈다. 문제는 모든 관객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 <다빈치 코드>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음모론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영화 같은 시각적 체험은 생생한 효과를 배가시키고 결국 이런 반응을 일으킨다. "만든 사람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잖아. 왜 믿질 못하는 거야? 의심병이라도 있어?"

 

최근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2회 만에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일부 평론가와 독자는 허구에 역사적 사실을 들먹이는 게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답답하긴 할 것이다. 제작사에서 게임을 시작했는데 시청자들은 진지하게 들어오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게 있다. 시청자의 상당수가 그 게임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생함의 효과는 강력하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으로 민감한 시기에 역사적 허구를ㅡ그것도 부정적으로ㅡ내세우면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결혼을 사실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독교계의 우려 못지 않은 일이 나타날 수 있다. 영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적지 않은 수의 영국인이 처칠, 간디 등의 실존 인물을 가상 인물로 생각하고, 반대로 셜록 홈스나 로빈 후드 같은 허구의 인물을 실존 인물로 생각한다고 하니 가볍게 여길 일만은 아니다.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는 다를까? 사람들에게 춘향과 홍길동 중 누가 실존 인물이고 누가 허구의 인물인지 물어보자. 아마도 의외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책하지는 말자. 평지에서 보면 둥근 지구도 평평하게 느껴지는 법이니, 그들이 평평한 지구를 믿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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