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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1. 4. 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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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인지 기억하기도 어려운 오래전에는 스포츠를 중계할 때ㅡ국가대항전이라도ㅡ아나운서와 해설자가 항상 중립적인 의견을 표해야 했다. 속으로 특정 팀을 응원하고 있다고 해도 그 팀이 유리하게 해설하거나 그 팀 위주로 설명을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되었다. 사실 국가 대항전조차 아주 대놓고 편파적으로 한국을 응원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TV를 보는 외국 시청자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신이 선호하는 팀을 유리하게 해설하기 시작했다. 편파방송을 경쟁적으로 드러내며 자기 팀을 응원했고 상대방은 조금만 실수해도 조소를 날렸다. 시청자들도 그런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쾌감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축구 경기 중 자기 팀이 공을 뒤로 돌리면 잘한다고 응원하면서도 상대 팀이 공을 뒤로 돌리면 온갖 욕을 내뱉는 관중들에 너나없이 가담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나 흘렀을까. 이제 모두가 편파 해설을 한다.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렵다. 이미 오래전에 블로그는 자신과 관계있는 제품과 상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저 개인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줄 알았던 블로거는 이제 자신이 소개하는 제품을 칭찬 일색으로 도배하고 경쟁 제품의 단점은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자신이 그저 소소한 일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명확히 드러냈다. 유튜브도 아주 명확하게 그런 지점을 향해 간다. 그런 곳에서 이른바 균형을 찾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 제품, 회사, 정당, 단체, 연예인 등을 향한 편파적인 찬사와 일방적인 적대감이 양 진영을 명확히 가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어쩌면 배신감이 원인은 아닐까.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의 뉴스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미디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때 난 뉴스가 정말 '사실'만을 다룬다고 믿었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각 신문사와 방송사가 그들 자신의 성향과 광고주의 기호에 따라 정보를 조금씩 각색하고 과장한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그건 비단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랬다. 우리는 어떤 주장을 할 때 객관적 사실에 의지하기보다는 개인의 선호와 편향에 따라 말했고, 들을 때는 원하는 말 위주로 들었다.

만일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말한다면, 본 것 전체가 아니라 숨기고 싶은 건 감춘 채 말한다면, 본 것 그대로가 아니라 원하는 걸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 또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닐까? 오랜 경험 끝에 우리는 알아채고 말았다. 인간의 이런 성향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만일 세상에 공정과 정의가 없다면, 객관성이 존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건 무조건 응원하고 내가 싫어하는 건 이유를 불문하고 미워하겠다고. 짧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겠다고.

내가 살을 맞닿은 채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첨예한 대립이 수시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와 성폭력범들이 곧 창문을 깨고 들어올 것만 같은 인터넷상의 묘사에 비하면 현실은 평온한 편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논쟁이란 아주 소수의 사람이 벌이는 시끄러운 소란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전쟁과 기아, 폭력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다고 해도 저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처럼 사이버상의 갈등 역시 현실에 실재한다. 인터넷에서처럼 함부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인터넷은 수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우리는 진실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인터넷상의 수많은 개별 정보를 연결해 지혜를 얻어내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나는 언젠가 온갖 논쟁과 갈등에 휩쓸릴 아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잘 팔리는'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 자아실현은 보기 좋은 허울일 뿐, 목적은 '어떻게 해야 잘 팔리는 인간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가'를 배우는 데 있었다. 그걸 빨리 깨달은 아이들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른 성취를 이뤄냈다. 권력과 재물, 그 둘을 얻을 수 있다면 나머진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정보란 그것에 남보다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정보였다. 이윽고 우리는 사랑도 마음이 아니라 재물과 외모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늦게. 이미 한참 뒤처지거나 결혼을 한 뒤에야.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이들은, 그들이 교묘하게 홀리며 뒤로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이들은 마치 세상의 빛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그 충격을 방지하고자 우리가 깨달은 세속적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물론 그 충격은 오래가지 않고 심지어 이중적일 때가 대다수였다. 자신이 믿는 신을 두고 농담을 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도 다른 이의 신을 두고 농담을 하면 쾌활하게 웃는 사람처럼,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라는 소박한 장소에 누워 있었던 예수의 탄생일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그 밑에는 값비싼 선물을 가득 쌓아두는 우리처럼. 우리는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이는 깨끗한 척하지 말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제 어떤 이들은 입을 닫고, 어딘가로 숨기도 하며, 세상과의 이별을 택하기까지 한다. 결국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처럼, 심지어 악당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끝일까? 어쩌면. 부디 헤겔이 남긴 오랜 빛이 우리에게 닿기를 소망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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