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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승리 ㅡ 말과 문자의 교차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0. 12. 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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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이후 줄곧 대중 매체의 중심에 있었던 TV는 인터넷 뉴미디어의 막강한 도전을 받고 있다. 케이블 TV는 이미 사양길에 올랐고 IPTV도 안심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은 모두 영상 매체이고 그래서 서로 간에 점유율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뉴미디어, 특히 유튜브는 영상 매체의 왕좌만을 넘겨받은 게 아니었다. 인터넷의 텍스트 기반의 매체들 또한 유튜브에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내주어야 했다. 이는 곧 인터넷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자 언어에서 음성 언어로의 이행, 특히 유튜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과 글의 교차가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음성 언어, 즉 말은 글과는 다른 특색이 있다. 우선 말은 글을 읽는 것보다 편하게 다가온다.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은 일상에서 쓰는 몇백 가지의 단어와 평범한 표현 기술을 벗어나지 않지만, 글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은 격식이 필요할 때가 많다. 문어체에서 그런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즉시성에서도 말이 앞선다. 말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즉시 꺼낼 수 있지만 글은 기록용 도구가 준비되어 있어야 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말은 정보를 습득하는 측면에서 유리하다. 말을 들으며 다른 일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글을 읽으며 다른 일을 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몸짓을 주요 대화 도구로 선택한 영장류와 달리 인류는 말을 주요 대화 도구로 택했는데, 그 덕분에 생존에서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생물학자 리버만과 언어생물학의 권위자인 비커슨은 말의 탄생 시기가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을 밝혀 냈는데,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 같은 다른 영장류를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처럼 말의 탄생은 인류에게 획기적 사건이었다. 최근 학계에서 문자는 말을 보조해주는 수단이 아니라 말과 대등한 표현 방법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데, 만일 호모 사피엔스가 말 대신 문자로 대화를 시도했다면 다른 영장류를 앞서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문자는 몸짓이나 수화와 같은 시각적 신호체계이기에 당시 기술로는 효율 면에서 말을 앞서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는 순간적인 판단이 중요한 선사 인류의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요도에서 문자가 말을 앞서기 시작한 건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문자가 말을 완전히 압도한 것은 근래의 일로, 특히 인터넷의 탄생과 함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초기 인터넷 시대엔 문자가 말을 완전히 압도하여 음성 언어가 쓰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반적인 문서 작업은 물론 편지, 채팅, 온라인 구매 같은 거의 모든 작업이 문자로 이루어졌다. 말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어 보였다. 시간이 흘러 게임이나 인터넷 TV 같은 매체에서 말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비주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튜브가 나타났다. 유튜브도 문자처럼 시각 매체였지만 말을 교류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이제 검색조차 유튜브에서 하기 시작했다. 자료의 방대함으로는 기존 문자 체계가 쌓아놓은 것을 따라갈 수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유튜브를 택했다. 

 

이런 선택의 중심에 말이 있었다. 말의 특색이 독자들을 끌어당긴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가 꼭 음성 언어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방식만을 고집했던 기존 인터넷 매체들과 달리 유튜브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문자를 곧잘 썼다. 자막 정도의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상호 교류에 있어서 문자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는데, 문자는 다수와의 동시 교류가 어렵다는 말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이제 전통적인 인터넷 방송도 실시간 댓글 창을 열어두어 시청자끼리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튜브를 위시한 많은 인터넷 매체에서 말과 문자의 교차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튜브의 인기와 그로 인한 말의 부각은 문자를 경시하고 말을 중시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떠오르게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와 변론, 즉 말을 중시하였다. 반면 문자는 부작용을 강조했다. <파이드로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문자는 사람들의 기억력을 저하하고 지혜를 겉으로만 익히게 하며 상호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말보다 가치가 떨어졌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그 시대의 문자가 지녔던 한계를 거의 정확히 지적해 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지난 몇백 년간 맞지 않았는데, 고대 그리스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자 인쇄술이 발달하여 문자가 지혜를 탐구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문자야말로 기억력을 증가시키고 지혜를 깊게 하며 상호 교류를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이렇듯 문자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 음성의 문자화가 나타났다. 문자의 특색 중 하나인 기록의 편리성을 음성 또한 획득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말은 하고 나면 증발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런 명제는 거짓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말을 녹음할 수 있는 시대, 심지어 녹음한 내용을 검색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음성으로 기록하고 음성으로 들으며 음성으로 찾아본다. 가히 음성의 문자화라고 할 수 있다. 문자가 언어의 참된 본질에 장막을 두른다고 생각했던 소쉬르는 음성 그래픽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축음기에 주목한 바 있는데, 이제 그 기술이 발달하여 음성을 문자처럼 다루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유튜브 같은 인터넷 기반의 영상 플랫폼이 점차 말의 단점을 퇴색시키는 동시에 문자의 장점을 흡수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라디오와 TV는 말의 손쉬운 전달을 혁신적으로 내세웠지만 청자와의 대화가 쉽지 않아서 고대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말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해 내지 못했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체계는 문자의 상호 교류를 가능케 하여 문자 활용도를 놀랍도록 증진했지만 말이 지닌 이점을 완전히 흡수해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 고성능 카메라의 대중화와 편집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음성 기반의 영상을 손쉽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 매체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다수와의 동시 대화를 문자로 해결했다. 이것은 책은 물론 라디오와 TV도 해내지 못한 영역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루브르 박물관 난간에서 종이책과 전자책을 떨어뜨리고는 부서진 전자책을 바라보며 미래 시대에도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장담은 카메라의 시대에도 회화가 밀려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일부 화가들의 믿음처럼 역사 뒤편으로 밀려나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과 그 그림을 찍은 디지털카메라를 박물관 난간에서 떨어뜨리면 온전한 쪽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겠지만, 오늘날 역사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디지털카메라이다. 문자와 그것을 담은 책은 영원하겠지만, 그때가 되면 문자와 책은 중국 진나라의 소전체나 이집트의 신성문자 같은 취급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문자는 말을 나타내는 기호로 여겨졌다. 중국의 사회학자 정예푸가 피력한 바처럼 문자와 말은 동등한 취급을 받아야 마땅할지 모르지만, 만약 말이 기록에 있어 문자의 장점을 완전히 흡수하게 된다면 대중은 문자보다는 말의 매력에 훨씬 이끌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초기 인류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시대의 책은 지금과는 분명 다른 형태를 띠고 있을 것이다. 소리와 문자의 교류를 내세우는 오늘날의 진보된 기술과 그 인기는 그런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문자는 음파라는 새로운 형식에 저장과 검색의 길을 내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기술이 완성에 이르면 원로원에 전해질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승전보는 파피루스의 문자가 아니라 전파의 목소리로 생생히 전달되며 말의 승리를 선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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