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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놀부의 삶을 산다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0. 6. 26. 00:52

본문

1.

식물을 사들이기만 할 뿐 키우지는 않는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남편이 집 안에 있는 식물을 보는 것만 좋아할 뿐 키우는 데 필요한 공은 들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 공을 아내에게 넘겼다. 아내는 집안일을 하는 주부였으므로 남편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아내는 남편이 식물을 사 오는 게 싫었다. 해야 할 일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물만 주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분갈이도 해야 하고 때때로 흙도 갈아줘야 하며 병충해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도 해줘야 했다. 집에 식물이 있길 바란다면 본인이 키울 것이지, 왜 그 일을 내게 맡기는가?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개인 시간이 부족한데 일거리가 늘어나 불만이 쌓인다. 


이 이야기를 들은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난 이 일화를 종종 떠올렸고 그때마다 여러 생각을 했다. 얼핏 보면 흔한 이야기 같았지만, 이 평범한 사건이 우리 인생사의 갈등을 집약해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남편은 식물을 키우라는 자신의 요구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힘들게,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 어렵사리 돈을 벌어오는데 아내가 이 정도도 해주지 않는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는 자신이 굳이 식물을 사다 주지 않더라도 아내가 '알아서' 집안을 멋지게 꾸며 주길 바랐다. "이렇게 식물을 직접 사다 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은 기대하지 않는다. 아내는 잘 키워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잘 키우기는커녕 툭하면 죽이니 속이 답답하다. 회사 동료는 아내가 식물을 잘 키워서 집에 갈 때마다 기분전환이 된다고 자랑하는데, 내 아내는 왜 못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직접 키우고 싶지만 잠자는 시간도 부족한 형편이니 그럴 처지가 되지 않는다. 아내는 자신의 어려움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내 그는 아내가 게으르고 자기 편한 것만 찾는다는 생각에 이른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집안일이나 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그는 상의도 없이 식물을 사 왔다. 자신이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식물을 말도 없이 사 온다는 건 문제가 있는데, 심지어 자신은 그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 물에 꽂아두면 되는 꽃다발도 아니고, 계속 물을 주고 관리를 해야 하는 식물을 계속 사 오니 일거리가 늘어난다. 상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사 오는 태도에서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간섭이라도 안 하면 모르겠는데 툭하면 잎이 시들었느니, 말랐느니, 웃자랐느니 하면서 잔소리를 한다. 그럴 거면 당신이 직접 키우라고 했지만 들어먹질 않는다. 게다가 그는 식물을 잘 키운다는 옆집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가정주부로서 나태하다며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 집 남편은 돈을 많이 벌어온다는 사실을 잊는다. 나도 그 집 남편처럼 그가 돈을 많이 벌어다 준다면 신이 나서 알아서 잘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해주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바라는 게 많은 이기주의자다.



3.

이런 관점은 아이를 키우는 일과 매우 닮아 있었다. 오늘날 결혼을 하되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은 아이를 키울 때의 괴로움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막 낳았을 때는 즐겁지만 키우는 일은 고되고 막상 키워놓아도 보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식물을 막 집에 들여놓았을 때만 기쁘지, 관리하는 일은 귀찮고 어려우며 식물을 몇십 년씩 안 죽이고 키운다고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관점과 닮았다. 


남자들은 아이를 낳는 데에만 관여할 뿐, 키우는 데엔 별 관심이 없다는 여자들의 불만과도 비슷하다. 남편은 자신이 돈을 벌어다 주면 그걸로 제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키우는 건 당연히 여자, 아내의 몫이라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가정주부의 삶을 선택했으면 아이를 키우는 것 역시 당연한 업으로 여겨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게다가 아이의 학교 성적이 안 좋거나 아이가 병에 걸리거나 하면 애를 어떻게 키우고 있느냐며 잔소리를 한다. 평소 관심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그럼 당신이 키워!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ㅡ이런 생각은 식물을 사다 주기만 할 뿐 키우는 덴 관심이 없으며 식물에 문제가 생기면 잔소리를 해댄다는 관점과 닮았다.


가정주부의 삶을 선택한 여자들이 집안일에 소홀하다는 남자들의 불만과도 유사하다. 상관의 지시와 지적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회사 업무와는 달리 가정일은 관리·감독해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아내 스스로 잘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잘하기는커녕 집안일에 소홀하고 점점 나태해지는 것 같다. 뭐라고 해주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아이들 아침밥은 당연하다는 듯 시리얼로 대충 때운다. 저녁 식사라고 해도 냉동된 반제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내주는 게 전부다. 애들은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는데 청소도 일주일에 한 번이고 뭐가 그리 힘든지 매일 피곤하다는 소리를 달고 산다. 보다 못해 내가 잔소리라도 한 번 하면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난리가 난다. 나는 회사에서 그런 잔소리를 매일 달고 사는데 말이다. 아이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걸 물었더니 평소엔 관심도 없으면서 타박한다고 하여 한바탕 싸웠다.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게 왜 자기 탓이냐면서 말이다. 그럼 애하고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 아내 탓이 더 크지, 회사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내 탓이 더 크단 말인가?ㅡ이런 생각은 집에 식물을 사다 주면 잘 키워주길 바랐는데 잘 키우기는커녕 죽이기나 하며, 식물 상태가 안 좋다고 말하면 시비 건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닮았다.



4.

정반대 사례도 있을 것이다. 식물을 사다 줘도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를 내는 경우가 있지만, 오히려 식물 키우는데 정신이 팔려서 이곳이 집인지 식물원인지 알 수 없어서 고민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사례들은 경우만 다를 뿐 우리가 항상 비슷한 문제로 갈등을 겪는다는 걸 보여준다. 


갈등의 원인 하나는 대가를 바라는 습성이다. 이른바 '우리 안의 거지 근성'이다. 우리는 남에게 바라기만 할 뿐 먼저 주는 데 인색하다. 이런 태도를 거지 근성이라 부를 수 있다. 거지는 구하기만 할 뿐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는다. 준다고 하더라도 곧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란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상적 행위에도 이런 태도를 보인다. 내 것을 주는 대신 상대방의 것을 바라고, 내 것을 준다고 해도 손에 계산표를 꼭 쥐고 있다. 준 만큼 받아내야 하므로 계산표를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다음엔 주지 않거나 상대방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또 하나의 원인은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살라는 말을 현재를 희생시키라는 이야기로 이해한다. 혹은 현재를 즐기라는 말을 미래는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로 알아듣는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도 즐겁고 미래도 좋은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즐기는 방향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를 하면서 괴로워하지 말고 공부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현재도 즐겁고 미래도 즐겁다. 만일 집에 식물이 있고 식물을 키워야 하는 입장이라면 식물을 키우면서도 즐거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만일 아이가 있고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다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즐거울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우선 내가 행복하다. 내 마음의 면역력이 올라간다. 내 마음이 그렇게 강해지면 세계를 바라보는 눈에 통찰력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을 즐겁게 생각하는 대신, 그 일을 즐겁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 다시 말해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떠넘긴다. 남편이 아이 키우는 일로 타박하면 '남편이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구나, 내게 조언을 해주니 참 좋구나' 하고 생각하는 대신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를 따진다. 아내가 남편에게 퇴근 후에 아이를 봐달라고 하면 '아내가 나와 아이의 관계를 생각해주고 있구나, 아내가 집안일로 힘들었으니 아이는 내가 봐줘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대신 그건 내 일이 아니라 네 일이라고, 돈 버느라 피곤한데 애 보는 일까지 맡기냐며 나무란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과제를 즐기기보단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우니 결국 피한다. 그런 회피는 결혼하지 말 걸, 아이를 낳지 말 걸, 너희는 결혼하지 마라, 결혼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마라, 하는 조언으로 이어진다.



5.

삶이 꼭 행복해야 하는가 하고 물을 때 현인들은 대체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고통은 피하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꼭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삶. 그런데 이런 삶을 지속할 때 우리는 권태에 빠지곤 한다. 권태도 괴로울 수 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찔러대는 괴로움보다는 덜하다. 그래서 삶에 있어 더 급박한 문제는 아니다.


누군가가 찌르는 괴로움을 줬을 때 현인들은 그 고통을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권유한다. 우리는 "찌른 사람이 문제 아닌가요" 하고 묻지만 적잖은 문제가 있다. 


우선 잘잘못을 가리기가 어렵다. 완전히 똑같은 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쪽에서는 찌를 만했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상대방이 어떤 원인을 제공했든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완고하게 '어떤 원인을 제공했건 찔러선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성별, 지역, 나이, 인간관계 등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 즉 '그럴 만했다'는 식으로 입장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이란 본디 자신 위주로, 자신이 속한 단체 위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 한계를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세우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위는 대체로 다툼으로 이어지고, 문제 해결은 물론 괴로움을 없애는 데에도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현인들은 그가 고통을 주는 데도 그 사람 곁에 계속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결국 이유가 무엇이든, 즉 아이 때문이든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든, 계속 옆에 서 있기로 선택한 건 본인이라는 것이다. 누가 찔러 괴롭다면 그의 곁을 떠나면 된다. 그를 고치려 하지 말고 떠나라. 하지만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미 어떤 일이 벌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라. 욕심을 버리는 것, 즉 기대치를 낮춰 즐거움을 찾는 것도 방법이고 남에게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앞에서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고 말한 뒤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유머를 배우는 것도 방법이고 정 안 된다면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취미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기보다는 상대방이 어떻게 해 주길 원한다. 아내가 아침 식사를 제대로 차려줬으면, 남편이 집에 빨리 들어와서 집안일을 도와줬으면, 아이가 공부에 집중했으면. 상대가 바뀌지 않으면 화가 나고, 화가 나니 다투고, 그러다가 고통스러워한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에게 의존적인 삶을 산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에게 휘둘리며 우리의 인생을 소모한다. 우리는 '나'라는 주체를 잃어버렸다.


요점은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상대를 바꾸려 하면 만나는 상대마다 내 힘을 소모해야 하지만 나를 바꾸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남을 바꾸려 하면 남이 좋지만 내가 나를 바꾸면 내가 좋다. 베풀면 베풀수록 행복하다, 좋은 일을 하면 내게 돌아온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다.



6.

문제는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을 '복을 받으려면 좋은 일을 해야 한다' 하고 거꾸로 이해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했는데도 복이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상대에게 먼저 베풀었는데 상대가 내게 그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화를 내며 분노한다. 이는 곧 내게 불행이 깃드는 것과 같다.


<흥부와 놀부>라는 오래된 이야기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흥부가 훗날 복을 받은 까닭은 다리 다친 제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부는 대가를 바라지 않았고 대가 없이 제비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흥부의 이야기를 들은 놀부는 다리 다친 제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면 복을 준다기에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줬다. 그러고는 '이제 복을 가지고 오라'며 제비를 날려 보냈다. 그때 놀부가 받은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ㅡ꼭 놀부처럼ㅡ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것을 한다. 연인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생각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대가'를 '평등'이나 '자격'이라는 이름으로 슬몃 바꾸어 상대에게 자신의 정당한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내가 이만큼 돈을 벌어다 줬으니 넌 집안일을 이만큼은 해야 해, 넌 집에서 하는 일이 없으니 애도 네가 다 봐야 해, 내가 집안일을 이렇게 많이 했으니 이제 애는 네가 봐야 해, 넌 돈을 많이 못 벌어 오니까 집안일을 이만큼 해줘야 해, 내가 데이트 비용을 이만큼 냈으니 이제 네가 이만큼 내야 해......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오늘날의 가르침은 놀부의 삶을 따른다. 흥부가 받았던 복은 너무나 멀리 있다. 가까이 있는 건 흥부의 가난과 주걱으로 뺨을 맞는 수모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흥부의 그런 나약하고 불행한 모습이다. 심지어 제비를 치료해 주는 모습을 두고도 '제 앞가림도 못 하는 게 어디서 주워온 제비나 치료하고 있으니 그걸 보는 아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며 흥부를 우롱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놀부는 부유하다. 그래서 당당하고 누구에게 굽신거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탐욕과 몰인정을 기억하지 않으며, 기억한다 해도 칭송한다. 우리는 갑질을 비난하면서도 놀부가 했던 갑질은 잊는다. 그런 식으로 사회에 만연한 갑질에 자신 역시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놀부가 이야기 끝에 받았던 화는 너무나 멀리 있다. 우리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를 따른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가 바로 그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다. 까마귀가 노는 곳에 가면 까맣게 물드는 게 당연하다. 사회가 이미 까만데, 내가 까매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게 왜 내 잘못이란 말인가? 우리는 까만 것을 보면 더럽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 역시 까맣다는 걸 모르고, 안다고 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정당화한다. 이런 사회는 필연적으로 서로 증오하고 분열하는 사회로 나아간다.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처럼.



*



며칠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 두통으로 심한 고통을 겪다가 다시 한 번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그 양자의 관계. 나는 왜 이런 괴로움을 겪어야 하지? 난 왜 이런 불편함을 타고 났지? 평등을 바라는 자의 아이러니, 그런 자의 고통. 


결국 이 모든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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