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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종해야 하는 이유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0. 6. 18. 22:11

본문

1.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충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배우는 아이의 특성을 이야기한다. 이때 '행동'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운다. 다시 말해 부모 자신은 늦게까지 TV를 보면서 아이에게는 TV를 보지 말라고 한다면, 아이는 겉으로는 복종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는 보면서 왜 나는 못 보게 해!' 아이의 이런 불만은 결국 훗날 TV를 오래 보는 습관으로 드러나고 이는 아이가 부모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배운다는 이론이 어긋나지 않음을 증명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부모가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충고의 하나라고 한다면 '자기는 보면서 왜 나는 못 보게 해!'라는 아이의 불만은 우리가 가장 많이 하고 또 듣는 변명이라 할 수 있다. 논리학은 아이의 이런 생각에 '피장파장의 오류'라는 이름을 달아두었다. 피장파장의 오류는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를 따질 때 그 '무엇' 자체를 두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논하는 상대방이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두고 따질 때 일어난다. 부모가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하고 말했을 때,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부모님도 내게 거짓말했잖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하지 말라는 건 옳지 않아요" 하고 말한다면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피장파장의 오류는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실상 우리가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의 하나이다. 만일 저 오류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오류를 쉽게 범하지 않아야 한다. 과거에 그런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쉽게 고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지적을 받을 때 특히 이 오류를 쉽게 저지른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로 시작하는 이 오류는 대개 지적하는 상대방 역시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으니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반론으로 이어진다. 내가 집에 일찍 들어오길 바란다면 너 역시 집에 들어오라, 내가 집안일을 성실히 하길 바란다면 너 역시 성실히 하라, 내가 네 물건을 소중히 다루길 원한다면 너 역시 내 물건을 소중히 다루어라, 내가 거짓말하지 않길 바란다면 너 역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논리학에서는 이런 대응을 명백히 오류라고 본다. 이것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상대방이 이전에 거짓말했다는 사실이 내 거짓말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왜 이런 오류가 사라지기는커녕 빈번하게 일어날까? 당사자 한쪽, 즉 지적받는 쪽은 이 문제를 논리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받는 사람은 그 지적을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의 문제, 정의의 문제로 보고 싶어 한다. 거짓말의 경우를 보자. 지적받은 사람도 평상시엔 거짓말이 좋지 않으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은 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안다. 만일 누군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거짓말한 사실을 들키면 비난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과거에 나와 비슷한 잘못, 즉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 내가 거짓말을 한 일로 비난한다면 그건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은 날 비난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의 거짓말을 모른 척 넘어가 준 적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날 비난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진다. "넌 날 비난할 자격이 없어. 왜냐하면 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지. 게다가 그때 넌 네 거짓말에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잖아." 이런 반응은 논리적으로 보면 옳지 않다. 그 사람도 동일한 잘못을 했다는 사실은 내 잘못의 변명거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내 행동을 참으로 만들어 주지도 못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했을 뿐이다. 하지만 공정과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무언가 잘못되어 보인다.



2.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함부로 지적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공정성의 시비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따라서 매번 실수를 저지른다. 살다 보면 빨강 신호등에 건너기도 하고 불법 주정차를 하게 되기도 하며 거짓말도 하게 되고 약속을 못 지키기도 한다. 매번 정의롭게 살지도 못하고 매일 부지런하게 살지도 못한다. 그런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교통 법규를 잘 지켜라, 정의롭게 살아라, 부지런하게 살아라" 하고 말한다면ㅡ그리고 그 말의 대상이 우리와 수평적 관계에 있다면ㅡ"그러는 너는?"이라는 반박을 받기 쉽다.


이런 문제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배우자나 자식에게는 무언가 기대하는 게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기대가 옳다고 믿는다. 우리는 현명한 배우자, 올바른 자녀를 기대하고 배우자와 자녀를 그런 길로 이끄는 걸 옳다고 믿는다. 남편이 직장을 핑계로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아내가 식사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자녀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짜증을 심하게 부리면 우리는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체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사연이다. 남편에겐 늦을 수밖에 없는, 아내에겐 식사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자녀에겐 짜증을 낼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충고 혹은 바람을 말했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듣고자 했던 게 아니니 '아, 그랬구나'라는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가족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이 바란 대답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네가 나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어, 네가 혼자라는 기분에 외로움을 느낄지 몰랐어, 일찍 들어오도록 노력할게', '당신이 내가 만든 식사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지 몰랐어, 당신이 내 음식을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몰랐어, 반찬을 많이 만들진 못하더라도 식사 시간은 맞춰보도록 할게', '내 짜증이 부모님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가 무심코 내는 짜증이 버릇으로 굳어져 내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앞으로 짜증 내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요.'


이런 기대와는 달리 돌아오는 반응은 일이 많았다거나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거나 짜증이 나는 걸 어떡하느냐는 식의 변명처럼 들리는 대답이다. 가족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이 현명하다면 자신의 조언을 멈출 것이다. 그는 즉시 자신의 조언을 멈추고 오히려 상대방의 대답에 공감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 그렇게 일이 많았구나, 아이들이 정말 사람을 정신없게 하지, 맞아 나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쑥 짜증을 낼 때가 많았지. 내가 섣불리 당신을, 너를 판단했구나.


하지만 우리는 불완전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가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했던 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대답에 공감해주기보다는 그들의 그런 태도를 계속 지적하고 만다. 그들이 그런 대답을 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설령 눈치챘다 하더라도 거기서 멈추고 싶지 않다. 거기서 멈춘다면 애초에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매번 일이 그렇게 많을 수가 있어?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 '아이들 일이 많다고 해도 밥할 정신은 남겨 둬야 하는 거 아니야? 애를 키운 지 몇 년인데 아직도 애들한테 끌려다녀?', '그래도 그렇게 짜증을 내는 게 맞아? 버릇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오면, 이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공정성의 문제에 휘말릴 차례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했는데? 네가 그럴 말할 자격이 있어? 엄마 아빠는 저번에 짜증 안 냈어요?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요?'



3.

지난날의 권위주의는 무너진 지 오래고 이제 가족 내 구성원의 관계도 수평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수평은 곧 평등을 뜻하고 평등은 곧 누구나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 동일한 자격은 자신을 지적하는 자에게 그 지적에 걸맞은 자격을 요구한다. 


그런데 자격을 따지는 정의론은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지 못한다. 정의론은 논리나 수학처럼 명확한 답이 나오는 분야가 아니다. 가정 내에서 공정과 정의를 따지게 되면 놀라운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공정과 정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주제이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자신만의 관점에 서서 정의론을 펼치다 보면 신혼 초에 겪었던 억울함뿐만 아니라 유년 시절에 겪었던 트라우마까지 꺼내 가며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얼핏 보면 평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지만 우리 내부에는 평등에 대한 대단히 놀라운 열망이 잠들어 있다. 이 열망은 순간순간 깨어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정당한 몫을 요구한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 가족 관계의 갈등은 대개 평등, 정당한 대가의 요구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을 밟고 올라서거나 자신을 그의 발아래 무릎 꿇리고자 이런저런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 역시 자기 나름의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그런 요구를 하고 있다. 우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역시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하고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저항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결코 가정 내에 국한되지 않음을 잘 안다.


사회 문제는 일단 접어 두자. 가족 내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인간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런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4.

종교계가 제시하는 방법의 하나는 순종이다. 이리저리 따지지 말고 상대방의 말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물론 순종의 대상은 신이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를 신처럼 모시라는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어떻게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순종이란 개념은 평등, 동등한 자격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불교에서는 상대방을 향한 순종을 욕심을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이해시킨다. 그에게 굴복하라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어떤 행동에도, 어떤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순종하는 태도를 통해 배우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의 눈높이를 고려한 처사이다. 상대방의 비난이나 부당한 주장, 예의 없는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상대방을 신이라고 믿지 않는 이상 진심으로 우러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상대방을 나와 똑같은 인간, 평등한 사람, 나와 같은 자격을 지닌 구성원이라 보는 순간 우리는 상대의 불만을 들어줄 수가 없다. '나도 참고 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요구를 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불만을 입에 올려? 무슨 자격으로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해?' 하는 마음이 끓어오른다. 우리가 보기에 우리는 '피해자'이고 상대방은 '가해자' 혹은 '위선자'이다. 우리는 이런 이분법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신이라면, 정말 신이라 믿는다면 우리의 불만을 한 발짝 뒤로 밀어 둘 수 있다.


다시, 이런 가르침은 평등이라는 절대적 가치에서 어긋나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내나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먼저 순종해 주면 상대방도 내게 순종해 준다는 식의 대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요구나 불만을 비판 없이 수용하라는 뜻도 아니다. 순종하는 태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우선 그렇게라도 해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배우라, 그렇게라도 해서 유지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이 괴롭지 않다, 괴롭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문제를 보다 평정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런 마음가짐에서 시작해야 그 어떤 문제에도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을 하고 있으면 설령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은 편안하다. 정토회의 법륜 스님은 우리가 사는 공간을 무균실로 만들려 하지 말고(가족을 고치려 들지 말고) 그 대신 우리의 면역력을 키우는 데 힘쓰라(어떤 말과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키우라)고 했다. 일반 가정을 무균실로 만들고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니 애써 봐야 헛되다. 면역력을 키우는 쪽이 우리의 건강에도 더 좋다. 결국 그러한 뜻이다. 


기독교도 이러한 방식에 일부 동의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인 키르케고르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쳤던 아브라함을 인간이라는 실존적 존재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단계라 이야기한 바 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에 따르는 것은 인간이 따를 수 있는 최고 단계의 순종이며,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런 절대적인 역설, 순종이라는 역설을 극복해야만 인간이 실존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합리성의 관점, 평등이나 자격을 논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실존적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나 칸트, 헤겔처럼 이성을 따르는 방식은 감정에 충실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인간의 근본적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나님에 순종하는 삶, 그런 신앙적 태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키르케고르의 생각은 비록 대상은 다르지만 순종하는 태도로 시작하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현대 철학은 구조의 문제를 제시한 바 있다. 우리가 오늘날 겪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뒤에 숨어 있는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서양의 7음계를 사용하는 작곡가는 동양의 5음계와 같은 분위기의 곡을 만들기 어려우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우리 각자가 그런 체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언어학자인 소쉬르는 우리가 자유롭게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언어체계에 지배받으며 그 규칙, 즉 '랑그'에 따라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데리다는 명백히 일어난 한 가지 사실마저도 그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현실은 조작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푸코는 서구 사회의 질서를 세웠다는 이성의 놀라운 폭력성과 권위에 주목했다. 그는 이성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정상과 비정상, 표준과 비표준, 중심과 변두리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한 뒤 한쪽에 권력를 부여하여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였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의 윤리, 정의, 목적의식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이성이 만들어낸 근대적 가치에 불과했다.


이런 주장이 한 가지로 암시하는 것은 주체와 자유의 소멸이다. 나의 어떤 행동은 내가 존재하는 현실의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때 나라는 주체는 사라진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이 속해 있는 틀에 따라, 자신이 지닌 관점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뿐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고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유발되고, 한번 나타난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이 구조를 타파하지 않는 한 우리는 불안과 고통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현대 사상은 이성에 지배받는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거나 해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려 한다. 



5.

그래서 신에게 순종할 수 있을까? 철학적 사고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일단 선악과를 먹고 나자 자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능력이 신에게 미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선악을 알게 되자 선악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타인을 저울에 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순종은 잠재된 권력의 타파, 평등의 실현을 위한 첫걸음이지만 그렇게 '대가'를 생각하는 순간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순종이 첫걸음이라고 말하는 순간 방향을 잃었고, 그저 순종하라고 하는 순간 피해자인 우리에게 복종을 가르친다며 비난하게 되었다. 이런 역설을 평범한 우리가 헤쳐나가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상대방을 저울질한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믿는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자만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배운 가르침을 결코 우리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타인을 심판하는 잣대로 이용할 뿐이다. 종교는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원죄에서 찾고, 현대 철학은 구조, 헤게모니, 이데올로기, 패러다임에서 찾는다. 우리는 결코 이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아내를, 남편을 신처럼 떠받들라 했을 때 나는 '네'라고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이 뭐 별거냐' 하고 생각한다. 순종하라고 하는 이유, 그건 결국 내가 순종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내가 갇혀 있는 틀을 보지 못한다. 기껏해야 타인의 틀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철학도, 어떤 예술도 나를 평안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저 남을 주시하는 한, 내가 지닌 종교의 한계 또한 그와 같다. 이것이 내 내면의 어둠이며 나의 한계이다.


이런 생각으로 밤이 깊어간다. 아이가 무섭다고 이야기하는 어둠이 찾아온다. 나 또한 두려워하는 어둠. 하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어째서? 나는 왜 아빠도 무섭다고, 무서운 게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게 뭐가 무서워?" 난 호기롭게 말한다. 난 어둠 속에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이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나 자신에게 말한다. 주저하듯 망설였지만 애써 기색을 감추며,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ㅡ어둠이 깊어질수록 별은 빛나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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