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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바깥쪽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0. 6. 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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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명백한 흐름 중 하나는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 우리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믿음이다. 옛 시대 사람들에게 막사발은 그저 무언가를 먹는 데 쓰는 도구에 불과했지만 현대인, 그중에서도 스스로 취미가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예술품으로 보였다. 선사시대인들에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주술적 도구에 불과했을 테지만 오늘날엔 그 이름대로 '비너스'라 불린다. 우리가 지금 실생활에서 사용 중인 도구들도, 예를 들어 마우스나 휴대전화 같은 것들도 수천 년이 지난 후엔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대우받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은 이데아라는 원형처럼 태초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당대 의식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 우리는 그 시대의 문화가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고 믿게 되었다. 과거엔 인간의 본성이 정해진 채 태어났다거나 사물의 쓰임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변기가 <샘>이 되고 동성애가 합법화되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천재는 오직 그 자신의 능력으로 발현되며 성공 역시 오직 그 자신의 노력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인간의 본성 또한 그 자신이 지닌 채 태어나며 환경의 역할은 미미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천재도, 성공도, 우리의 본성도 오직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시각은 여전히 주류가 아니며 그저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다. <샘> 같은 작품은 여전히 소수의 특정한 취향에 불과하다. 명백한 건 그런 흐름이, 그런 기조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무엇은 원래 정해져 있는 데로 쓰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이른바 정답,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이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 그저 사회적 계약이 한 번 파기된 것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화를 내는 것도 잘못된 게 아니라 낼 수도 있는 일이 되었다. 문제는 이혼이나 화 같은 현상을 잘못으로 정의하고 아카데미의 가르침을 진리로 여겼던 경직된 문화와 시각에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관념은 너의 잘못이 곧 나의 잘못이고, 너의 잘못된 모습이 곧 잘못된 나를 반영하며, 사회에 나타난 불행한 결과가 곧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인식으로도 이어졌다. 


만일 내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공사장 바닥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면 난 그걸 발로 차버렸을 것이다. 누군가 그걸 주어 들고는 '비너스'라 부른다면 웃었을 것이다. 나도 경직된 주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액자는 그 안의 그림을 미술로 보이게 하고 미술관이라는 장소는 그 안의 물건을 예술품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의 옷과 거주지도 모두 그런 환영을 가한다. 과거엔 그런 환영을 거부하고 '진실된 것'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문화가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환영이 곧 실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아직 주류는 아니지만 그런 사조가 퍼지고 있으며 점점 더 거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류에 속한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그 환영이 미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주술 같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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