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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21세기로 건너온 중세의 노스트라다무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20. 4. 7. 22:38

본문

1.

<호모데우스>의 전반부를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종교, 사상, 교육 등을 통해 믿게 되는 어떤 질서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상상의 질서다. 우리는 성공, 구원, 천국, 운명, 장대한 계획 따위를 믿지만,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결론도 없다. 그저 어떠한 일들이 차례로 일어나는 것뿐이다.' 

 

저자인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허무주의적 교리가 아니다. 그가 볼 때 이 세상의 온갖 불행은 오히려 성공, 구원, 운명 따위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믿는 성공과 배우자가 믿는 성공이 달라서 갈등이 일어나고, 내가 믿는 신과 이웃이 믿는 신이 달라서 전쟁이 일어난다. 즉 내가 믿는 질서와 타인이 믿는 질서가 다름으로써 온갖 불행이 일어나는데, 이 질서는 상상의 질서이므로 그것 때문에 다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니 그런 질서가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다가올 미래에 관한 예측이 담겨 있다. 그는 기술과학이 밝혀낸 인간의 초라한 모습에 기반하여, 다시 말해 인간에게 영혼, 의지 같은 건 없으며 인간은 그저 뇌의 전기화학적 작용에 따를 뿐이라는 대전제 하에 머지않은 미래의 암울한 모습을 기술했다. 이 후반부는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라는 '신' 대신에 '기술과학'이라는 21세기의 '신'을 집어넣어 한편의 묵시록적 SF 다큐멘터리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그의 다큐멘터리에는 신이 천사와 비둘기를 대동한 채 내려와 인류를 구원해주는 장면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다큐멘터리가 예고하는 인류의 종말은 요한계시록보다 훨씬 비극적이다.

 

그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상당히 다양한 주제의 여러 근거를 제시했는데 대체로 문화사, 과학사, 종교사를 인용하고 있다. 다만 그의 글은 새롭다거나 독특하다기보다는 이미 제시된 바 있는 여러 저자의 글을 소화, 흡수하여 새롭게 재구성해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집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세간의 명성을 생각하면 그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특수한 견해는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암울한 미래라 할 수 있으나 아쉽게도 이 역시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책 후반부를 몇 가지 실험적 근거를 토대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채웠는데 그 시나리오는 SF 애호가라면 한 번씩 접해 보았을 법한 내용이다. <A.I.> <가타카> <공각기동대> <아이로봇> <엑스 마키나> <블레이드 러너> 등등. 다만 이런 SF 영화나 소설 들이 미래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유발 하라리는 그런 염세적 미래가 거의 결정되어 있다는 듯 진술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과 그가 근거로 제시하는 여러 실험은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작동 원리가 아니라 겉에 보이는 현상에 바탕을 두기에 SF 영화나 소설에서 상상했던 암울한 미래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는 인공지능이 만든 그림과 음악을 인간이 만든 것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그래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십 년 안에 인간을 추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는 새로운 천 년이라는 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20세기 중반, 컴퓨터 탄생 초장기에 앨런 튜링이 고안해 냈던 인공지능 구별법인 튜링 테스트에서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않았다.

 

 

2.

<호모데우스>의 전반부에서 보이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반부에 나오는 그의 주장도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는 어떤 명제를 두고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 위주로 모아 서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호모데우스>는 설명문이라기보다는 논설문인데, 이 논설문은 하나의 급진적인 주장을 성립시키려는 목적에 들떠 있다. 따라서 <호모데우스>의 전반부 또한 한 명의 독자로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상당하다. 다만 <호모데우스>의 독특함은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는 전반부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점치는 후반부에서 드러나고, 후반부의 과격성에 비하면 전반부의 진술은 온건하게 보일 정도이므로, 우선 그가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예측해 놓은 후반부를 다루고자 한다. 

 

 

3.

<호모데우스>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진술상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기술 발전, 특히 인공지능에 너무나도 후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그는 인공지능 기술이 앞으로도 지수함수 그래프를 그리며 발전을 할 것으로 예측한다. 어쩌면 그는 1960년대에 달로 향하는 우주선을 보며 몇십 년 안에 인간이 화성에 유인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리라 예측했던 수많은 과학자의 장밋빛 전망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우주공학이 놀랍게 발전하여 순식간에 그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화성에 식민 기지는커녕 유인 우주선조차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인공지능의 능력을 명백히 과대평가한다. 먼저 그는 인공지능을 방대한 데이터와 놀라운 처리 능력을 지닌 단순 기계와 구별하지 않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공지능은 추론 능력을 지닌 '진정한' 인공지능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특정한 규칙이나 패턴에 따라 출력값을 보여주는 일을 빠르게 수행해내는 기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기계들이 워낙 방대한 데이터와 빠른 연산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마치 추론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처럼 보일 뿐이다. 이건 진정한 인공지능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유발 하라리의 우려와는 달리 아직도 그 성취가 요원하다.

 

지금도 인공지능 기술이란 대량의 데이터와 빠른 연산에 의지하고 있어서 이 두 가지 기술적 지원이 없으면 사실상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가령 내가 겉표지를 걷어낸 단색의 책 한 권을 집어 든 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뒷면을 보여주었을 때, 인공지능은 내가 단순히 사각형의 물체를 집어 들었는지 아니면 저자가 있는 책을 집어 든 것인지 구분해 내지 못한다. 책에 관련된 수많은 데이터, 그것도 나처럼 표지를 없앤 뒤 제목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책을 집어 들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 데이터를 인위적으로 집어넣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컴퓨터가 어느 정도의 변량을 스스로 추가한 뒤에야 구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처리를 해 놓은 이후라고 해도 내가 책 표지를 촬영하여 실사 크기로 뽑아낸 뒤 그 인쇄물을 집어 들면 인공지능은 그걸 2차원의 사진이 아니라 책이라고 오인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세상엔 인공지능이 다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데이터와 변수가 존재하여 아직도 특정한 분야의 특정한 조건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만 그 특정한 조건에서 보여주는 능력이 놀라워서 인공지능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놀라운 기대가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기술은, 과거 우주공학이나 인공신경망 이론이 수십 년간 정체에 빠졌던 것처럼, 또다시 정체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그런 가능성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4.

결과적으로 이 책의 대중적 가치는 흩어져 있는 여러 지식을 한 권의 책에ㅡ분량이 많아서 보르헤스의 미학에 다가서지는 못했지만ㅡ모아서 집대성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독자는 그가 품고 있는 다양한 지식에 놀랄 것이고,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사고 전환에 감탄할 것이며, 이런 다양한 지식을 모아 한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성취까지 목격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 즉 자아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이며 자유의지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놀라운 주장에 따르면, 내가 <호모데우스>에 내린 후한 평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읽은 이 책을 좋게 평가함으로써 내가 독서에 쓴 시간을 헛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난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자기 편의적 시각에 적잖게 불편했지만ㅡ그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그렇기에 나의 자아는 한 개가 아니라 최소한 두 개[각주:1]이다ㅡ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책이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의 '꾸며내는' 본성을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만일 우리에게 우리의 경험을 하나의 긍정적인 이야기로 꾸며내는 능력이 없었다면 이 책은 물론 우리 사회는 진작에 불타 없어졌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저런 상상의 질서, 허구, 망상 때문에 다투며 전쟁을 일삼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상상의 질서에서 불타버린 도시를 재건할 힘이 나타나기도 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선동적으로 분열시킬 또 하나의 극단이 타오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주장을 예언이 아니라 단순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여러 번 말한다. 자신의 주장은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넓히려는 시도라고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의 진술 방식은 너무나 단호하여 가능성이 아니라 예언처럼 들리는 데가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데이터교에 지배되는 묵시록적 결말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어서 스펙트럼을 넓힌다기보다는 하나의 파장으로 인식을 축소하고자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5.

아마도 그에겐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에둘러 이야기하기보다는 놀랍도록 비극적인 결말이 곧 닥쳐올 것처럼 예고하여 인류에게 충격 요법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이는 급진주의자의 방식을 닮은 데가 있다. 그런 전술은 놀랍도록 빠른 반응과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늦장을 부릴 여유가 없을 때, 파국이 눈앞에 있을 때, 이런 요법은 곧장 효험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효과가 언제나 긍정적일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호모데우스. 2020. 4. 7.

 

 

  1. 책을 읽으며 불쾌함을 느꼈던 '경험하는 자아', 그리고 불쾌함을 희석시키면서 이왕 지나간 시간을 좋게 생각하자고 꾸며내는 '이야기하는 자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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