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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격언집>, 고전을 읽는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20. 3. 1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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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을 읽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고전의 유혹>을 쓴 잭 머니건은 고전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강조하며 읽기를 권유했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다소 해학적으로,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나으니 고전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고전 중에서도 특히 수필은 오래전의 사람들이 당시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갔는지 궁금한 마음에서 읽는다. 그때마다 내가 깨닫게 되는 공통된 사실은 옛사람들의 생각이 오늘날의 생각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며칠 전, '르네상스 최대의 인문주의자'라는 수식이 달린 에라스무스[각주:1]의 <격언집>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이 지은 풍자소설 <우신예찬>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쓴소리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비판적인 독자들이 <우신예찬>의 주인공인 '우신'을 그 글을 쓴 자신, 즉 에라스무스와 동일시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이 책에서 이들은 우신이 아니라 에라스무스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대화를 구성한다고 할 때, 비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말을 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이것을 파문당할 일이라 하겠는가?"[각주:2]

 

다시 말해 글을 쓴 소설가와 소설 속의 '나'는 다른 인물인데도 독자들이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고는 자신을 비난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어 그에 대한 생각을 적은 바가 있었다. 그런 오해는 시대를 뛰어넘는 현상이었다. 먼 훗날에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의 항변을 읽고 있자니 르네상스 최대의 인문주의자도 별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인간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스도마저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보며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각주:3] 하며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듯 한탄한 바 있었으니, 신학자였지만 인간이었던 에라스무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격언집>을 읽는 내내, 나는 마치 500년 전의 르네상스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디선가 에라스무스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한스 홀바인 남긴 에라스무스의 초상화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그의 입이 움직여 내게 말을 건넨다. 이 놀라운 시간 여행.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다.

 

 

2.

부북스 출판사의 이 <격언집>은 완역본이 아니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 자기 참조를 하고 있는 많은 격언들이 빠져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1. 2005년 12월 28일에 발표한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에라스뮈스'라고 표기해야 옳다. 국어사전에도 '에라스무스' 대신 '에라스뮈스'가 올라가 있다. 그런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은 모두 2005년 이후에 발간된 것인 데도 저자를 '에라스무스'로 적고 있다. <격언집>도 저자를 에라스무스라고 적고 있으니 그를 따랐다. [본문으로]</격언집>
  2. 에라스무스 <격언집> 김남우 옮김 (부북스 2018) 166쪽 [본문으로]</격언집>
  3. <마태오 복음> 17:17 (공동번역 성서) [본문으로]</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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