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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환영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0. 3. 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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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눈으로 본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는 단순한 요구가 자기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ㅡE. H.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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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손가락 인형극에 쉽게 몰입한다.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손가락 인형들을 사람의 손가락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손가락 인형 뒤에서 그를 조종하던 사람이 나타나면 현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제 뒤에서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다음번에 손가락 인형극을 보게 되면 또다시 인형극에 빠져든다. 인형극을 보고 있는 동안, 손가락은 살아 있는 인형이 된다.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선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온다. 조형 예술을 보며 재질을 분석하고 영화를 보며 제작 노트를 떠올리고 있으면 그를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에서 "정해진 기대를 통해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우리의 상상력에 작용'하고 '그 결점을 우리의 상상으로 보충'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예술 매체도 제대로 작용할 수 없을 것"[각주:1]이라고 말했다. 


연극에서 넓은 벌판을 달리는 수많은 말들을 묘사할 때, 우리는 무대라는 좁은 공간의 결점을 우리의 상상으로 보충해야만 한다. 과거엔 이런 상상을 자의로 실현해야만 했고 그래서 상상력이 중요했다. 하지만 현대의 환영 기술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환영과 현실의 구분이 어려워질수록 상상은 자리를 잃는다. 악역을 연기했던 배우들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손가락질하거나 가게 주인이 자기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는 등, 사람들이 실제 자신을 배역과 혼동한다며 고충을 털어놓곤 한다. 오늘날의 TV 드라마는 현실성이 너무 뛰어나서 드라마 속 인물들이 실재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오늘날 더 시급한 것은 어쩌면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을 구분해 내는 분석 능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미처 그런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무수한 자극에 노출된다. 그래서 마치 자가 면역 질환을 겪는 환자처럼, 자신의 풍부한 'TV 드라마적' 상상력이 자신의 마음을 공격하는 질환을 앓게 되었으니, 이를 '자가 상상력 질환'이라고 부를 만하다.


미술은 그런 질환과 거리를 두고 있다. 시각적 진실이 중요한 건 분명하지만, 위대한 화가 중에서 본 것과 똑같이 그릴수록 뛰어난 예술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없다. 가상현실은 환영을 쫓아가며 닮고자 애쓰지만 미술은 환영을 바라보되 거리를 유지한다. 3D, 4D 등의 기술로 현실감을 강조하고 있는 영화는 이런 측면에서 점차 가상현실을 닮아가고 있다. 영화 또한 상상력의 결과물이지만 미술의 입장에서 보면 수동적으로 작용하는 상상처럼 보인다. 훌륭한 TV 프로그램이 많음에도 여전히 아이들에게 TV보다는 책을 권하는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 


사진도 바로 그러한 혐의 때문에 예술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롤랑 바르트도 그러한 이유로 사진은 예술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그런 기조에서 <밝은 방>을 썼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사진은 횡포를 부려 다른 이미지들을 압도해 버린다."[각주:2] 하지만 책은 다르다. 책을 볼 때 우리는 자발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현실과의 구분 능력 또한 키울 수 있게 된다. 미술도 예술의 선에 서 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화가가 현실을 얼마나 똑같이 그려냈는가가 아니라, 관습적인 듯하면서도 제각기 다르게 재현해 낸 세계를 향한다.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에서 마티스의 유명한 일화를 언급한 바 있다. 마티스의 초상화를 보던 부인이 여자의 팔이 너무 길다고 하자 마티스는 "부인, 잘못 보셨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아니라 그림입니다"라고 답했다. 여자의 비현실적으로 가느다란 팔을 보면서 상상해야 하는 것, 그 팔을 보며 연상하게 되는 것, 존 컨스터블은 바로 거기에 미술의 즐거움 있다고 말했다. 어윈 파비안의 1955년 <파이낸셜 타임스> 포스터는 "아주 희미한 유령 같은 이미지가 굴뚝 위로 내려앉는"[각주:3] 것만 같은 연상을 일으켰고,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은 빛을 소용돌이로 일깨웠다. 바로 그때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능동적 환영이 나타난다. 자연의 빛이 예술의 빛으로 바뀌는 변모, 그 환영에 미술의 즐거움이 있다.




  1.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차미례 옮김 (열화당 2008) 18쪽 [본문으로]
  2.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44쪽 [본문으로]
  3.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차미례 옮김 (열화당 2008) 22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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