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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 <장자>, 장자에게 도를 훈계하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20. 3. 3. 22:29

본문

1.

장자는 가난을 즐겼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무소유를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도 불필요한 것을 갖지 말라는 것이지, 소유 자체를 거부하라는 것은 아니다. 장자는 가난한 삶의 이로움을 말하며 "손바닥만 한 땅은 가꾸기 쉽지요. 남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밭은 힘을 쓸 일이 없으니까요" 하고 말했다. 생계에 필요한 손바닥만 한 땅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나라 왕이 낡아서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장자를 보고 "선생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져 버렸소?"라고 물었을 때도 "저는 가난할 뿐 망가진 것이 아닙니다. (...) 옷이 해지고 신발이 구멍 난 것은 가난한 것이지 피폐한 것이 아닙니다. (...) 지금 저는 어리석은 군주와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들이 다스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망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하고 답했다. 


그런 삶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독일의 문필가인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에서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는 오랜 격언에 지당한 말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다만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든다"라고도 했다. 가난한 사람이 받는 수치심은 놔둔 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건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격언은 변질하여 이제 가난한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린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가난은 대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결국 가난은 사람을, 그의 가족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장자는 커다란 이치를 전달하고자 한다. 각 개인은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욕망의 노예가 될 때, 두려움에 시달릴 때, 그럴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개인의 행복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인위적인 것들에 속박당한 상태로는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행복 하고자 한다면 문명사회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발터 벤야민을 다시 인용하면, 욕망으로 가득한 사회에 속해 있는 한 그 구성원들이 가난한 사람을 끊임없이 손가락질하며 수치심을 일으키기에 행복할 수 없다.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분명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자의 말은, 살짝 바꾸어 말하면, 가까운 이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자가 오롯이 '개인이 알아서' 가난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장자는 위나라 왕과의 대화에서 나라가 어지러우면 개인이 가난으로 망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 망가지고 만다고 했다. 위정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장자는 그렇게 훌륭한 문명사회가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덕지세'의 이상적인 사회, 즉 원시적인 자연 공동체로 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가 "인류 최대의 사기"라고 주장했던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 즉 수렵-채집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자신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그런 사회만이 다수의 이기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오직 그런 사회만이 가난으로 드러난 수치심을 정신이 나약하다는 개인적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장자가 꿈꾸었던 멋진 신세계가 언제 나타날지 기약이 없다. 이곳은 '장자'보단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를 꿈꾸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우리가 문명을 떠나 도와 덕의 삶을 실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얻고자 하는 지혜는 그 사이 어디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를 헤맨다.



2.

그 사이 어딘가를 산책하고 하는 이들에게 아마도 다음의 문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사람의 행위는 남을 해치는 데 참여하지 않지만, 인은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행동할 때는 이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문지기나 노예를 천시하지 않는다. 재물을 놓고 다투지 않지만, 양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남의 힘을 빌리지는 않지만,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으며, 탐욕을 하찮게 여기지도 않는다. 행동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괴팍하고 이상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행동은 대중을 따르지만 아첨하는 것을 천시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작위나 녹봉으로 그를 부추길 수 없고, 형벌이나 모욕으로 그를 치욕스럽게 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은 구분할 수 없고 미세한 것과 거대한 것은 구분할수 없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를 터득한 사람은 명성이 나지 않고, 완전한 덕을 지닌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은 자기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타고난 분수를 지키는 데 있어 최고의 경지를 말한 것이다. (...) 만나면 헤어지고 이루어지면 망가진다. 모나면 꺾이고 신분이 높으면 비방을 받고, 무언가를 하면 결함이 생기고, 현명하면 모함을 받고, 어리석으면 우롱당한다. 그러니 어떻게 전혀 속박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가련하지. 그대들은 기억하거라. 속박이 없는 삶은 오직 도와 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3.

다만 동시에, 공자의 다음과 같은 한탄도 잊지 않는 게 좋겠다. 이는 뛰는 법을 배우려다가 걷는 법마저 잃어버려 땅을 기어다니면서도 장자의 말을 따라하며 우쭐대는 우리를 보고 시름에 잠길 우리네 가족의 한탄이다. 공자는 동해의 자라에게 바다 이야기를 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그 광대함에 놀라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실제의 개구리는 자라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비난하거나 네가 우물에 대해 뭘 아느냐고 야단을 친다. 심지어 장자라는 작자가 공부가 부족한 것 같다고 깔보며 자신이 직접 도를 알려주겠다고 거드름을 피울 것이니, 이것이 평범한 세상의 이치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다.


"자네는 지적 능력은 시비도 잘 구별하지 못할 정도이면서 장자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모기에게 산을 지게하고 노래기에게 황하를 달리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 또 지적 능력은 지극히 오묘한 이치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인데 한 때의 말재주에 스스로 만족한다면, 이는 허물어진 우물에 사는 개구리가 아니겠는가? (...) 이는 그저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송곳으로 땅의 넓이를 측정하려는 것과 같을 뿐이야. (...) 떠나가게. 그리고 자네는 저 수릉의 젊은이가 걸음걸이를 배우러 한단에 갔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는 그 나라의 걸음걸이를 배우지도 못했고 또 옛날에 배운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결국 기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지금 자네도 떠나지 않는다면 자네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잊어버리고 자네의 본업마저 잃어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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