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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관해 쓸 때, 우리의 한계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0. 5. 2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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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으면 그립다가도 가까이 있으면 싫어지는 게 우리의 마음이다. 오랜 세월 바닷가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바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사람들은 평지가 발달하지 않은 해안가를 삶의 무대로 삼았기에 바다를 이용하여 생계를 이어가야 했지만, 거칠고 예측이 어려운 바다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바다를 벗어나 육지로, 험준한 산으로라도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내가 만난 몇몇 제주도 주민들은 제주도엔 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제주도민의 고집과 인색한 면모를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찾기도 했다. 우리 마을, 우리 고향엔 볼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이 있는 것의 고마움을 느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가까이 있던 것들은 응당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해 보인다.

 

도시인은 전원생활을 꿈꾸고 시골 사람들은 도시 생활을 꿈꾼다. 멀리 떨어져 있는 건 무릇 좋아 보인다. 하지만 깨끗해 보였던 집안 바닥도 허리를 굽혀 자세히 보면 먼지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건 실재가 아니라 관점에 좌우될 때가 많다. 허리를 세워 먼 곳을 바라보면 많은 것이 좋아 보인다. 내가 미워하던 너도, 네가 미워하던 나도 먼 곳에 세워놓고 보면 좋은 사람이었다. 몸은 가까이 있어도 눈은 멀리 두고 보는 지혜가 우리에겐 없었다.

 

내가 아직 바다를 좋아하는 건 그 정도로 바다를 가까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난 바다를 바라보기만 할 뿐 터전으로 삼지는 않는다. 바다뿐만 아니라 산도 그렇다. 바다를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갑작스럽게 들이친 파도에 온몸이 흠뻑 젖거나 강한 바닷바람에 집안 창문을 열 수 없는 지경이 되더라도 바다를 향한 미움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바닷가에선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다는, 산은 그 자리에 그저 묵묵히 있었지만 우리는 그를 두고 사랑을 줬다가 뺏고, 그리워했다가 원망한다. 사람의 일도 그렇다. 관계에서 아픔을 몇 번 겪고 나면 그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 가까이 있게 된 계기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젠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으니까. 아마도 그것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두 눈을 가려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우리의 한계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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