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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문제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1. 12. 1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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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정신의학을 넘어 인류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그가 출간했던 <토템과 터부>를 들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성적 충동을 금기(터부)하는 것이 콤플렉스를 유발한다는 정신분석 이론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자 원시 부족사회를 연구했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이론을 인류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고자 했고 그래서 인류학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근친상간이 인간의 본능인지, 만일 본능이라면 왜 근친상간을 기피하게 되었는지, 다시 말해 왜 족외혼 사회가 되었는지를 연구했다. 난 그의 폭넓은 사고와 관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연구 결과에는 편향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각 사회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근친상간의 금기가 근친상간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만일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근친혼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굳이 이를 법률로 정해 금지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근친상간의 유혹을 억제하는 어떤 믿을 만한 자연적 장벽이 존재한다면 법과 인륜과 같은 냉엄한 금지 조항들이 불필요했을 텐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여기서 완전히 잊고 있습니다. 진리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 오늘날 아직도 남아 있는 원시인들, 즉 미개한 종족들의 경우, 근친상간은 우리보다 더 엄격하게 금지됩니다."(정신분석 강의, 2018, 452~453)

 

이는 얼핏 보면 그럴듯한 주장이어서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이론에 수긍했다. <황금가지>로 알려진 저명한 인류학자 프레이저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프레이저는 "만일 족외혼자가 자연적 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법적인 형벌로까지 그런 본능을 강화시킬 필요가 없을 것"(문명은 부산물이다, 2018, 81)이라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고대의 법을 해석할 때 이런 방식의 추론을 사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율을 두고서는 그 계율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먼 옛날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살인자들의 자손이며, 조상들이 핏속에 가지고 있었던 살인에 대한 욕망"(문명 속의 불만, 2021, 67~68)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살인을 하려는 충동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면, 굳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만들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러나 사회학자 웨스터마크는 이런 논법에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법률이 수간을 금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프레이저는 사람들이 수간에 관해 보편적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문명은 부산물이다, 2018, 82)

 

프로이트나 프레이저의 논법에 따르면, 수간을 금하는 계율은 곧 인간에게 수간이라는 본능적 충동이 보편적으로 강하게 내재해 있음을 뜻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프로이트와 프레이저가 펼친 주장은 논박된다.

 

프로이트는 법률이 인간의 천성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제도적 금기를 성년이 되어 나타나는 각종 신경증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사회학자 정예푸는 법률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상식은 법률이 우리의 본성을 막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법률이 금하고 있는 것은 다수가 범하는 행위가 아니라 소수가 범하는 행위였다. 그는 살인, 절도, 동성애를 예로 들었는데, 이 사례 모두가 사회 구성원 다수가 아니라 소수에게 한정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금한 것이었다. 즉, 법률은 인간의 천성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법률의 냉혹한 면모가 사람들로 하여금 법률은 다수의 자연적 본성에 적대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것 같다. 이는 정말로 엄청난 오해다."(문명은 부산물이다, 2018, 85)

 

정예푸의 법률에 관한 설명은 웨스터마크의 반박에 힘을 실어 준다. 즉 법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한 것은ㅡ프로이트나 프레이저의 생각과는 달리ㅡ그것이 횡행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웨스터마크가 세웠던 이론은 프로이트의 이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면이 있다. 웨스터마크는 족외혼의 탄생이 우생학이나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웨스터마크의 이런 주장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과도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인데, 유년 시절에 함께 한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낄 수 없다면 원천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나타날 수 없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강박을 설명하면서 펼쳤던 주장을 다시 반복할 것이다.

 

"강박 행위처럼 그렇게 현실적으로 손에 잡히는 결과들을 초래하는 것을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정신분석 강의, 2018, 378)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모든 이에게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런 경향이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인간에게 그런 경향이 관찰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일 웨스터마크의 주장처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남매 사이에선 성적인 매력이 발휘될 수 없다면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그런 현상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 웨스터마크는 그런 사례들이 어디까지나 아주 극소수의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는 일반적인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문명은 부산물이다, 2018, 72)

 

이 두 거장은 일반화의 문제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이트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론을 펼치고 웨스터마크는 일반적인 경향을 두고 논한다. 프로이트는 그런 관점을 거부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인류의 아주 소수에서만 관찰 가능한 성향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본능을 다룬다고 믿었다. 강박 신경증, 히스테리, 편집증 같은 증상들도 단지 발현되지 않았을 뿐 거의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의 생각에 인간에겐 무의식이 있고 그 무의식 안에 잊힌 성적 억압이 담겨 있으며 훗날 이것이 여러 가지 병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결국 프로이트에 대한 대개의 비판은 바로 이 도약, 이러한 비약에 집중된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프로이트의 이론이 완전히 부정된다면 이는 부당한 일이다. 학계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이론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 이유를 화학 혁명을 거치며 완전히 부정당했던 플로지스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학철학자 장하석은 19세기 화학자들이 플로지스톤을 박멸하지 않았다면 그 이론은 전자의 발견을 앞당겼을 거라고 말하며 과학에 다원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여러 결함이 있지만 이미 다른 분야의 창조적 발판이 된 바 있고 아직도 그 여지가 남아 있다. 장하석은 많은 사람들이 껄끄럽게 여기는 창조론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창조론을 논쟁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창조론이 설득력 있다고 느끼는 것에는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다."(물은 H2O인가, 2021, 550)

 

같은 이유로, 정신분석을 논쟁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나는 지금도 정신분석에 매력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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