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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반죽을 커터칼로 자르는 이유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7. 2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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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도 높은 어떤 제빵사가 크루아상 반죽을 자를 때 커터칼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왔다. 대부분 큰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갔지만 한 시청자가 제빵사의 커터칼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다. 커터칼에는 방청유가 발려 있기 때문에 음식에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밑에는 '하룻강아지가 장인에게 충고하는 꼴'이라는 비아냥 섞인 댓글이 달려 있었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제빵사가 크루아상 반죽을 자를 때 커터칼을 사용한 이유는 우선 반죽이 잘 잘리기 때문일 것이다. 주방에 있는 식칼 쓰면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 테지만 식칼을 날카롭게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칼을ㅡ일반 요리에 비하면ㅡ자주 사용하지 않고, 또 사용하더라도 칼날이 아주 잘 서 있을 필요가 없는 제빵 분야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칼날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크루아상 반죽은 면이 매끈하게 잘려야 겉모양이 살아나므로 칼날이 날카로워야 한다. 무딘 칼로 반죽을 자르면 반죽이 눌려 크루아상의 외층을 예쁘게 살리기 어렵다. 커터칼은 날이 매우 날카롭게 서 있어서 반죽을 산뜻하게 잘라낼 수 있다. 날이 금방 무뎌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여분의 칼날이 많아 교체가 쉽다. 이 편의성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외부의 층을 잘 살린 크루아상. 사진 출처: https://www.chantalguillon.com, "How to Enjoy Breakfast 'The French Way'" by Anold, May 20, 2018.

 

두 번째 이유는 커터칼의 두께가 매우 얇고 일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들은 칼날부가 아주 얇은 반면 반대쪽인 칼등은 상대적으로 두꺼운 형태를 띠고 있다. 그렇지 않은 형태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처럼 두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칼날이 아무리 날카롭다 하더라도 반죽을 자르는 과정에서 반죽을 옆으로 밀어버리는 효과를 일으킨다. 즉 칼날이 날카롭다 하더라도 반죽이 눌리는 걸 피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 제빵사는 커터칼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커터칼은 날이 아주 쉽게 녹슨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시중의 문구용 커터칼에는 예외 없이 방청유가 발려져 있다. 방청유는 녹을 방지하거나 제거하는 약품으로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체내에 흡수되서는 안 되는 물질이다. 그래서 원론적으로는 커터칼을 음식물을 자르는 데 사용하면 안 된다. 

다만 그 제빵사가 커터칼의 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방적인 비난을 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일반적인 커터 날이 아니라 티타늄 같은 특수한 커터 날일 수 있고,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평범한 커터 날이라 하더라도 몸에 해로운 방청유를 잘 씻어낸 뒤에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방청유를 씻어내면 녹이 슬거나 음식물이 끼이는 등의 문제가 쉽게 발생하는데 이 문제를 제빵사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방적인 비난을 하는 건 옳지 않다.

문제는 제빵사가 문구점에서 사 온 칼날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또 음식용 위생장갑이 아니라 야외용 목장갑을 낀 채 빵을 만드는 모습이나 무언가를 세심하게 잘라야 할 때마다 여러 종류의 커터칼을 번갈아 사용하는 모습에서 그가 커터칼뿐만 아니라 공업용 도구를 식품에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 모든 예상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관념상 커터칼 사용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아주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이 제빵사는 어떤 행위에는 그에 걸맞은 도구가 있음을 간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커터칼의 날이 아무리 날카롭다 하더라도 커터칼로 회를 뜨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중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실 제빵사들은 반죽을 자를 때 커터칼을 흔하게 사용한다. 물컹한 반죽을 손쉽게 자를 수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커터칼을 쓰라고 가르치는 곳도 있다. 그러니 커터칼로 반죽을 자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교육의 힘은 여러 의미로 놀라운 데가 있다.

 

다만 반죽용 칼, 반죽에 칼집을 넣을 때 쓰는 칼이 따로 있다는 점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반죽용 슬라이서가 따로 있는 데도 그를 이용하지 않고 문구용 커터칼을 쓰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여전히 편의에 치우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요리에 진지하게 임하고자 하는 어떤 정신의 실종. 우리나라에 기술자는 있으나 장인은 없다는 오래된 한탄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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