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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파스타 만들기, 플럼 토마토를 사용하는 이유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5. 31.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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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영국의 요리사가 이탈리아의 유명한 토마토 농장을 방문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당연하게도 그 농장의 토마토로 만든 파스타를 맛보는 것이었다. 난 농장 주인이 어떻게 파스타를 만드는지,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른 토마토로 어떻게 소스를 만드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쉽게도 자세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흥미로운 부분을 포착할 수 있었는데, 이탈리아의 토마토 농장 주인마저도 파스타를 만들 때 '통조림' 토마토를 섞어 넣는다는 것이었다.

 

그 통조림 토마토는 껍질만 벗긴 가공용 토마토, 즉 '플럼 토마토'를 다른 재료와 일정 비율로 섞어 캔에 담아둔 것이다. 플럼 토마토는 대추 토마토처럼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생식용 토마토에 비해 수분과 씨앗이 적고 단단하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캔에 담긴 플럼 토마토를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다. 

 

 

2.

파스타 소스를 만들 때ㅡ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생으로 먹는 토마토가 아니라ㅡ가공용 플럼 토마토를 쓰는 이유는 플럼 토마토가 씨앗과 수분이 더 적으며 단단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플럼 토마토가 더 달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씨앗이 적으면 소스로 만들기에 편하고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상대적으로 수분이 적은 것도ㅡ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ㅡ조리 방식에 따라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가공용 플럼 토마토가 생식용 토마토에 비해 더 달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올바른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플럼 토마토가 더 달다면 플럼 토마토를 가공용으로만 이용할 이유가 없다. 사실 서구의 토마토는 단맛보다는 보기 좋은 단일한 빨간 색상, 질병 내성, 수확량 증가, 보존성을 위해 개량되어 왔다. 단맛만 따진다면 우리나라의 생식 토마토가 더 달다. 그것도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가 아니라 울긋불긋했던 예전의 토마토가 더 달다. 요즘 마트의 매대에 올라오는 빨간 토마토는 유통기간을 늘리기 위해 후숙한 것이 대부분이라 당도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생식용 토마토로 소스를 낸 파스타는 단맛이 덜해서 가공용 플럼 토마토로 만든 파스타에 비해 맛이 없다"는 흔한 주장엔 근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단맛이 약해서'라기보다는 '신맛이 너무 강해서'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맛은 주관적이므로 신맛이 강한 걸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어쨌거나 신맛은 쓴맛 다음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맛이다. 신맛은 비린내를 잡아주기도 하지만, 음식물의 부패나 과도한 발효를 나타내는 의심의 맛이기도 하다.

 

 

3.

결국 파스타를 만들 때 무조건 가공용 플럼 토마토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식용 토마토에 씨앗이 많다고는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이 파스타 면을 '알 덴테(AL DENTE)'로 설익혀 씹는 느낌을 즐기는 것을 생각하면 씨앗이 씹히는 감도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씨앗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판단도 주관적일 뿐이다. 수분이 많은 것은 좀 더 끓이면 해결할 수 있고 신맛도 다른 향신료의 첨가로 해결이 가능하다. 결국 꼭 플럼 토마토를 넣어야 제대로 된 파스타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은ㅡ맛에 관한 여러 심리 실험이 이미 증명했듯이ㅡ고정관념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심리학에서 '각인', 행동경제학에서 '앵커'라고 부르는 이 효과는 우리의 실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반인들만의 생각은 아니다. 일류 요리사들도 플럼 토마토로 소스를 만들어야 제대로 된 파스타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파스타'란 무엇일까? 감칠맛이 살아 있는 데다가 그 감칠맛이 토마토의 신맛과 조화를 이뤄 훌륭한 감흥을 일으키는 파스타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가공용 플럼 토마토가 생식용 토마토에 비해 글루탐산이 풍부하여 감칠맛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파스타의 감칠맛을 오직 토마토로 내는 것이 아니란 걸 생각하면ㅡ대표적으로 치즈의 도움을 받는다ㅡ맛을 생각할 때 꼭 플럼 토마토만을 정답으로 볼 이유는 없다. 

 

결국 우리가 파스타를 만들 때 플럼 토마토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파스타의 원조라고 생각하는 이탈리아인들이 파스타를 만들 때 바로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파스타에 올리브 오일 대신 포도씨유를 넣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재료를 엄선해서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된' 파스타라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세워 놓은 '전통'이라는 앵커. 신맛을 느끼는 감각이 서양인들과 차이가 있음에도 우리의 맛과 레시피의 기준은 앞으로도 그것을 벗어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4.

캔에 담겨 있는 '홀 플럼 토마토'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일반 대형 마트에서 원하는 품질의 캔 토마토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DOP 인증을 받은 이탈리아산 '산 마르자노 토마토 홀'을 구하고자 한다면 온라인 구매를 하는 편이 이롭다. 

 

아래 사진은 한 대형 마트에서 구입한 이탈리아산 '홀 플럼 토마토'다. 이탈리아산이긴 하지만 DOP 인증을 받은 것보다는 가격이 두 배 정도 저렴하다. 

 

아래의 캔 토마토와 닭 안심을 이용해 파스타를 만들어 보았다. 소금과 후추 외엔 마땅한 향신료가 없는 상태였지만 재료를 기다리기보다는 만들고 싶을 때 만드는 것이 아직까지는 좋다.

 

이마트에서 구입한 데체코의 '토마토 홀'. 플럼 토마토이며 캔에 담겨 있다. 2019.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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