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둘째 출산 선물로 필요한 게 있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난 법랑 밀크팬이 좋겠다고 했다. 남자가 선물로 밀크팬을 사달라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밀크팬에는 주둥이가 달려 있어 내용물을 그릇에 담을 때 편하다. 그러니 밀크팬으로 둘째의 이유식을 만들면 좋을 거란 생각을 했다. 굳이 '법랑'을 언급한 건 그게 선물용이기 때문이었다. 기왕 선물이니, 밋밋한 색의 팬보다는 법랑이ㅡ법랑의 최고 장점은 빛깔에 있다ㅡ좋을 듯했다. 잘 관리하면 최소 수십 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아이가 한창 자란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싶은 심리도 있었다. "이건 너희 할머니가 너를 위해 주셨던 선물이야, 여기에 네가 먹을 이유식을 만들곤 했지." 난 마당 앞의 오래된 나무뿐만 아니라 도구에서도 개인의 역사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의미를 떠나 밀크팬이 꼭 필요할까? 밀크팬이 없던 시절에도 난 이유식을 잘 만들었냈다. 이유식을 그릇에 담다가 바닥에 흘리기도 했지만 그건 부주의의 결과였다. 조금 더 숙련도를 쌓거나, 조금 귀찮더라도 숟가락을 이용하면 모든 내용물을 깔끔하게 그릇에 담을 수 있었다.
난 간혹 도구에 너무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언젠가 카스텔라 틀이 있어야 카스텔라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법랑 밀크팬도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도마나 칼도 필요 없다며 주방 가위로만 모든 요리를 해내는 사람이 있다. 로푸드를 주식으로 삼는 사람은 가스레인지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중세 유럽의 주부들은 칼 한 자루, 국자 하나, 도기 팬 하나, 꼬챙이 하나, 가마솥 하나 정도로 거의 모든 요리를 해냈다. 그런 이들과 비교하면, 나는 확실히 도구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꼭 그런 오래된 과거와 오늘날의 특이한 일부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 각 시대에는 시대상이 있는데, 지금은 소비를 도덕이라 말하는 동시에 죄악으로 여기는 혼돈의 시대로, 물질만능이 가하는 상대주의의 습격이 언제 날아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였다.
물론 이제 와서 과거 나치 독일이 주민들에게 아인토프의 검소한 식사를 강요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가마솥으로 모든 요리를 다 해내던 시절은 끝난지 오래다. 커다란 가마솥이 있는데도 소스팬 하나를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건 너무 도구를 중시하는 행위일까?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 시대라면 타당한 말일지도 모른다. 불에 직접 굽는 로스팅이 중요한 조리 수단이어서 꼬챙이 몇 개면 각종 음식을 만들 수 있었던 시대 말이다. 나 역시 빵틀 하나로 거의 모든 종류의 빵을 만들 수 있다. 심지어 크루아상도 가능할 것이다. 네모난 빵틀에서 만들어 낸 것을 크루아상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말이다.
돌솥비빔밥을 만들려면 돌솥이 있어야 한다. 물론 돌솥이 없어도 비빔밥은 만들 수 있다. 다만 '돌솥' 비빔밥이 아닐 뿐이다.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는 돌솥비빔밥을 집에서 만드는 행위가 연중 행사에 불과하여 사치스런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이들에게 소스팬, 프라이팬, 소테팬, 캐서롤, 아우텝사, 콜드론, 사모바르의 발명은 과잉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마솥 하나면 충분해 보일 테니 말이다. 남편에게 찻물을 끓일 주전자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물을 가마솥에 끓인 뒤 바가지로 떠서 우려내면 되지 않느냐, 쓸데없이 돈낭비 하지 마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18세기 요리 작가인 해나 글라스는 버터를 녹일 때에도 그에 맞는 팬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순히 버터를 녹이는 행위 그 하나만을 놓고 보면 커다란 무쇠솥을 쓰든 작은 구리팬을 쓰든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효율이나 그 뒤에 이어질 조리 과정을 생각하면 그에 합당한 팬을 쓰는 것이 좋을 수밖에 없다. 요리의 세계든 목수의 세계든 거기엔 각각의 용도에 맞는 도구가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지 오래다. 중국 식당의 요리사가 음식 재료를 썰 때 두꺼운 차이다오 대신에 가볍고 날렵한 프랑스식 셰프 나이프를 쓰거나 웍 대신에 최신식 테플론 코팅 냄비를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 중국 식당을 '제대로 된' 곳이라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도구를 낭비라 생각하는 사람도 프라이팬에 된장찌개를 끓이지는 않는다. 검소한 생활을 주장하는 사찰의 스님들조차 몇 개의 팬과 그릇만으로 모든 요리를 해내지는 않는다. 그러니 일류 레스토랑과 같은 '바트리 드 퀴진'을 추구하진 못하더라도, 주방 벽걸이에 스테인리스 냄비와 프라이팬, 법랑 밀크팬, 무쇠 스킬렛 정도 걸어두는 걸 사치스러운 행위라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주된 식단이 매운탕과 김치라 할지라도, 때로는 말끔한 스튜팬으로ㅡ매번 매운탕을 끓이던 냄비가 아니라ㅡ양식 요리를 해보고픈 마음이 드는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그런 욕구가 전혀 없다면, 그는 냄비 바닥이 둥근 것과 각진 것의 차이가 요리 방식에 어떤 영향을 일으키는지 모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그는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매 끼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도구의 특성을 무시한 조리 방식에서는 식문화를 발견하기 어렵다. 적절한 도구의 사용에서 오는 편안함과 즐거움이 아니라 근검절약에만 초점을 맞춘 환경에서는 식문화가 아닌 단순한 식습관이 남기 쉽다.
2.
그런데 내 스스로 떳떳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게도 일말의, 도구를 '쟁여 놓고'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존재한다. 심지어 카스테라 틀은 '너무' 비싸기까지 했다! 언제나 '너무'가 문제였다. 정도의 문제. 볶음밥을 만들 때마다 음식 재료를 뒤섞는 데 애먹는 주부라도 볶음용 팬과 찌개용 팬을 따로 두기는 쉽지 않다. 얼핏 보면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몸이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는데' 괜한 걸 샀다는 자책과 비난을 막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사소한 소비에도 '너무'라는 죄의식이 나타나 마음을 짓누를 때가 있다. 애써 무쇠 스킬렛을 구입했지만 스테인리스 팬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음식이 잘 눌러붙는 성질에 충격을 받아 스킬렛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둔 뒤 까맣게 잊어버린 전과가 있다면 그 주부를 바라보는 시선엔 어떤 혐의가 더해지기 쉽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금언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한 우리들은 타인에게 아량을 베풀 이유가 없기에 그 시선에도 자비심을 두지 않는다. 주방에 걸려 있는 저 수제 구리 냄비는 어쩌면 조리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트로피가 아닐까? 저 사람은 그저 수집가가 아닐까? 그 경솔한 판단은 말로 이어져, 자존감 낮은 이에게 죄책감을 안긴다.
아마 나에게도, 누구에게라도 비슷한 혐의와 시선이 씌워져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런 혐의를 남에게 씌운 적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일방적인 피해자라 여기지만 실은ㅡ거의 예외 없이ㅡ가해자이기도 했다. 결국 누구나 실수를 한다. 따라서 그가 내일이라도 스킬렛을 꺼내어 길을 들인다면 그건 다른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그 물건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코팅이 벗겨지는 논스틱 팬이 아니라, 기름을 둘러 사용하면 쓰면 쓸수록 막이 입혀져 재료가 팬 위에서 춤을 추게 되는 스킬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후회의 대상이 심하게 유행을 타는 옷이거나 일 년만 지나도 읽을 가치가 사라져 버리는 주제의 책이었다면, 그런 물건을 사두고 곧잘 잊는 경우가 지금껏 많았다면ㅡ'이제 그만 사'라는 조언자의 말을 듣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나는 어떤 편이었나? 스스로 돌아볼 필요도 있다.
3.
우리의 관계는 대개ㅡ그 대상이 설령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ㅡ'적당한 선'에 달려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식의 장황한 글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평소 처신을 잘 하면서 믿음을 보여주는 편이 '정도의 문제' 해결에 훨씬 이로우리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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