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는 대로 고성을 뒤로 한 채 통영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고속도로 대신 한적한 시골길을 택했다. 주변을 감상하며 천천히 움직이기엔 아무래도 시골길이 좋다.
통영은 바닷가지만 산이 많은 동네라 적지 않은 마을이 계곡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계곡 마을도 낮은 곳에 위치하고 바닷가 마을도 형태상 낮은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으니 통영을 지나다 보면 마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게 될 때가 많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도로도 많아서 운전을 하다 보면 자꾸만 눈이 아래쪽 풍경으로 쏠리게 된다. 그렇게 마을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운전하다 보니 차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어느새 시내버스가 뒤에서 다가와 빨리 가라며 경적을 울려댔다. 느림의 미학이 살아있다는 시골도 버스 시간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왕복 2차선의 도로였기에 난 비상등을 켠 뒤 버스가 앞질러 갈 수 있도록 길 한쪽으로 비켜셨다.
통영에 들어서 처음 차를 세운 곳은 아름다운 포구가 자리한 안정리의 한 마을이었다.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데 도로 아래쪽으로 아담하고 예쁜 포구가 나타났다. 차를 세우고 관찰해 보니 어촌인데도 텃밭으로 쓰이는 곳이 많았다. 저곳에도 우리가 살 만한 땅이나 집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 이 마을 인근에 한국가스공사에서 운영하는 통영생산기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안전하다 할지라도 가스기지가 전원생활에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 안 있어 광도면사무소가 있는 읍내에 도착했다. 통영에 들어서 처음 마주한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엔 남부내륙고속철도를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직 철도가 없는 지역이라는 게 새삼 다가왔다.
차에서 내려 잠시 마을을 걸었다. 마을은 따뜻하고 한적했다. 3월의 남쪽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걷는 사람이 나 외엔 보이지 않았다. 광도면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광도초등학교도 조용했다.
한산한 마을이라고 생각할 무렵 어디선가 소음이 들려 왔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이 내는 소음이었다. 처음엔 들리지 않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으니 계속해서 그 소음이 들렸다. 소음의 원천을 따라 걸으니 곧 고속도로가 보였다. 광도면의 바로 옆을 지나고 있는 통영대전고속도로였다. 신기하게도 고속도로에 방음벽이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 고속도로가 개통된지 10년도 넘었는데 아직까지 면소재지 마을에 방음벽이 없어 놀라웠다. 주민들은 대체 이 소음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한창 통영-고성 국회의원 보궐선거 중이었으므로, 내가 만일 국회의원 후보라면 방음벽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곳 주민들도 이참에 그런 요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평생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그런 데까지 신경이 쓰였다.
통영 관광지도를 얻을 겸 광도면사무소에 들렀다. 생각보다 면사무소 내부가 넓어 놀랐다. 비좁은 서울의 주민센터보다 훨씬 쾌적해 보였다. 앞쪽에 앉아 사무를 보는 직원들도 매우 젋어, 많아야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난 어쩌다가 시골 면사무소에는 나이 많은 공무원만 있을 거란 선입견을 갖게 되었을까?
가까운 곳에 있는 한 직원에게 통영시 관광지도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직원은 "관광지도......"라고 한 번 되뇌이더니 옆 자리의 직원에게 관광지도의 행방을 물었다. 그 두 직원이 관광지도를 찾아 서랍을 뒤지는 동안 다른 한 직원이 그 작업에 끼어들었다. 관광지도 하나 때문에 직원 세 명이 애쓰게 되자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관광지에서 멀찍어 떨어진 면사무소에 들러 관광지도를 찾는 나 같은 사람도 몇 없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지도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관광지도가 아니라 통영시의 도로명주소 안내도였다. "이거라도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관광지를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 도로명주소면 충분했다.
사투리라는 건 참 재미있다.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은 국가인데도 고성군을 지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새 사투리에서 차이가 느껴졌다.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고성에서 들은 사투리와 통영에서 들은 사투리엔 뭔가 차이가 있는 듯했다.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은 여행을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사투리 차이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한다. 거제 사람이 "여기서 해 지는 곳을 향해 계속 가다가 사투리가 처음 달라지는 곳이 나오면 거기가 바로 통영이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사람들의 바뀌는 말투를 느끼며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뭔가 신비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듯했다.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난 사투리를 흉내내며 웃었을 것이다.
광도면의 골목길을 마저 걸었다. 오래된 마을이라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빈 부지가 나오면 혹시나 해서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처음 걸어 본 통영의 마을이라서 그랬을까. 정겨운 동네라는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을을 더 돌아보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었으므로 지체할 수 없었다. 통영에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였고 난 이제 통영 초입이었다.
통영에서 처음 마주한 한적한 포구. 통영시 안정리, 2019. 3.14.
광도면 읍내의 초입부. 통영시 노산리, 2019. 3.14.
주황색 첨탑이 아름다웠던 광도면의 교회. 통영시 노산리, 2019. 3.14.
광도면 읍내의 가장자리. 멀리 이곳 소음의 주범인 통영-대전간 고속도로가 보인다. 통영시 노산리, 2019. 3.14.
노산교 인도 위에 놓여 있던 판매용 나무들. 키위나무, 석류나무, 호두나무, 보리수나무 등 종류가 다양했다. 하나 구입하고픈 마음을 다잡느라 힘들었다. 마당이 마련되기 전까진 참아야 한다. 통영시 노산리, 2019.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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