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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9. 4. 4. 05:46

본문

1.

타인이 무례하게 행동하였을 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의견이 있다. 인터넷 여론은 물론, 최근 출판된 자기계발서에서도 이런 의견을 볼 수 있다.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다. 수십 년 전의 책에도 쓰여 있었던 내용이다. "약자에게 못되게 굴지 말라, 타인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 이것은 인간이 문명화된 이래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규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문제이다. 무례의 수준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문제는ㅡ항상 그렇듯이ㅡ'정도'이다. 


가령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일행이 있다고 해보자. 오늘날 새삼스레 유행하고 있는 금언을 따르자면 소음을 참지 말고 조용히 해달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도에서 내가 일행에게 다가가 "실내에선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런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저희는 나름대로 조용하게 대화를 한 것 같은데요? 당신이 민감한 것은 아닙니까?"라고 대꾸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황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더 따지고 싶다면 언성이 높았는지 주변에 한 번 물어보자 할 것이다. 하지만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일행의 목소리가 컸다고 대답을 해도 그 일행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무례하게 컸다는 걸 수용하려 들지 않을 수 있다. 예로, "지난 번에도 비슷한 톤으로 대화를 했는데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거나, "몇 분 전만 해도 자기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대화하는 일행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복잡한 문제는 따로 있다. 위 예시에서 난 일행의 무례에 대응하여 문제제기를 했는데, 살펴 보면 내 말에 반박한 일행의 입장 역시 나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들 역시 나의 무례에 대응하였을 뿐이었다. 그 일행은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것을 굳이 걸고 넘어가는 나의 '꼰대' 같은 무례함에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즉 나와 그 일행은 같은 논리ㅡ타인의 무례함에 맞서라ㅡ를 내세워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같은 논리로 맞서고 있는 둘의 우위를 무엇으로 판가름할 것인가? 만일 저 일행이 나의 갑작스러운 무례함에 기분이 언짢았음에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갔다면 서로간에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제기를 한 나는 내가 당당하게 맞섰기에 상대방이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봐, 이처럼 무례함에 맞서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어"라며 섣불리 남에게 조언을 하려 들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을 올바르게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느끼는 무례의 정도를 정량화하여 비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명한 이들의 조언은 대개 타인의 무례함에 '맞서기'가 아니라 '받아들이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상대방이 내 말에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의 가부를 떠나 우선 보듬으라는 것이다. 


이런 예를 들 수 있다. 여기 심성이 매우 유약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넌 마음씨가 참 착한 것 같아"라는 칭찬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는 '착하다'라는 단어에서 자신의 열등의식 중 하나인 나약한 태도를 떠올리고는 꼭 그것을 지적받는 것 같아 언짢은 마음이 든다. 그리하여 '저 사람은 왜 괜한 말을 해서 날 이렇게 기분 나쁘게 만들까?'라는 생각에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를 칭찬했던 사람은 그의 그런 태도에 놀라고 만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시 오늘날의 지혜로운 금언은 '피해자'의 감정을 우선 인정하라는 것이다. 즉 "공격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너무 민감하게 굴지 않았으면 해요"라고 하기보다는, "제 말에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접근이 상당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단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떠오를 것이다. "저 사람은 저래서 사회 생활을 어찌 하려나" 하는 안타까움이다. 세상은 전쟁터와 같다. 열에 아홉은 당신의 아픔에 관심이 없으며 나머지 한 명은 오히려 기뻐하는 세상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도덕과 아량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분명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유약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한편, '강해지라'고 말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된다.



2.

사실 조언의 충동은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까지 논의된 내용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엔 상대의 무례함에 맞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도 상대방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쉽게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 강경파, 급진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주장만 펼치다가 대화에서 이탈하고 말 것이다. "당신 목소리가 컸다고! 말을 해주면 반성을 좀 하란 말이야!" 하고 외치며 말이다. 상대의 무례를 지적하다가 자신이 무례해지고 마는 경우인데, 이것은 스스로를 윤리적이라 믿는 이들이 자주 빠지는, 독선이라는 이름의 첫 번째 딜레마이다. 


아주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이 '받아들이기'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의 먼저 제기했던 문제조차 잠시 접어 두고는 "아, 제 지적이 다소 무례하게 들렸나 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세상의 극히 일부에 속하는 도덕적인 인물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근래 유행하고 있는 최초의 의견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타인의 무례함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던 최초의 문제제기 말이다. 식당의 예시를 들자면 일행에게 다가가 조용히 해 달라고 양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일행이 그를 수용하지 않고 반박을 한다면 더 설득하려 들지 말고 곧장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편이 이롭다. 식당에서 시끄럽게 한 일행이 반박부터 했다면 더 이야기해 보아야 소용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맞서기로 시작하였더라도 곧장 받아들이기 단계로 넘어가는 편이 낫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내가 저 일행의 반박ㅡ시끄러운 편은 아니었다ㅡ을 먼저 받아들였으니, 저 일행 역시 나의 문제제기ㅡ시끄러웠다ㅡ를 뒤늦게나마 들어주려 하지 않을까?' 대개의 경우 이쪽으로 생각이 쏠리게 마련이다. 그것도 '뒤늦게나마 들어주려 하지 않을까'가 아니라 '뒤늦게나마 들어주는 것이 옳다'의 형태로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선행을 '대가'의 형태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행을 그것이 그 자체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언젠가 나에게 보답을 해주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라 인식한다. 권선징악, 그에 따르면 우리의 선행엔 언제나 보답이 따라왔다. 착한 흥부는 제비가 금씨를 물어다 주고, 정직한 나무꾼은 금도끼를 보장받는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언젠가 보답받기 때문이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건 그를 통해 영생을 보장 받기 때문이다. 위 예시 같은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저쪽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일행의 의견에 일리가 있거나 그 자체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행 역시 나와 비슷한 태도를 취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희박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대가 통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식의 진행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기계발서 같은 책에서 말이다. 대화법을 가르치는 상당수의 계발서들은 내가 이성적이고 부드러우며 자상한 마음씨로 접근하면 상대방도 기분을 풀고 나에게 착하게 굴 것이라 조언한다. 결과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성공률'은 다른 이야기다. 그런 책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웃이나 남편과의 불화를 그런 방식을 통해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성공률은 언급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성공했을지는 모르나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하고 험난했던 과정은 빠지거나 축소되기 일쑤다. 어쨌거나 성공적이었다고 써야 냉정한 출판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실제의 대화는 그렇게 원활하게,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소수에 속하는 도덕적인 인물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참고 견디며 상대방의 말을 계속, 계속해서 들어준다. 그리고 충분히 들어줬다고 여길 때쯤, 그때쯤 자신의 주장을 조심스레 내비친다. 그런데ㅡ그 도덕적인 인물들이 생각하기엔 아주 놀랍게도ㅡ상대방은 여전히 자신의 말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이 도덕적인 인물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리하여 결국 '저 사람은 참으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선한 사람들이 빠지는 두 번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자신이 먼저 양보를 했음에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서히 좌절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하여 '무례함에 맞서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례함에 맞서는 사람들'에게로 분노의 초점을 전이시킨다. '난 이렇게 의견을 양보했는데, 먼저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저 사람은 왜 양보할 생각을 안 하지? 왜 미안하다고 하지 않지? 너도 양보해! 너도 미안하다고 말하란 말이야!' 이들은 점차 자신이 먼저 취했던 태도, 즉 참거나 양보하는 태도를 타인에게도 요구하게 된다. 


군대나 회사, 가족의 세계에서도 다를 것이 없다. 당돌한 신입, 자기 주장 강한 며느리,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에 대한 분노. 이것이 자신을 선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태도 역전'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딜레마다. 이제 좋게 좋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례를 따지는 사람에게 오히려 무례하다는 인식을 받고 만다. 자신도 과거에 똑같이 행동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이 신비한 망각은 무언가를 바꾸고자 혈기왕성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 가끔 되살아 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을 조소하는 형태로 말이다. '하긴 나도 젊을 땐 저랬지.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아니야. 넌 어려서 아직 뭘 몰라.'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고 묻고 싶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세상의 오래된 논의는 단 몇 가지 주장만으로 해결될 만큼 간단하지 않다. 불교도가 세속을 뒤에 두고 먼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 것은 결국ㅡ아주 거칠게 말하면ㅡ세상이 '노답'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을 상대로 훌륭한 조언을 해주고 계신 법륜 스님이 듣고 있는 최대 비난이 무엇인가. 여성들을 향해ㅡ질문자가 대개 여성이다ㅡ'참으세요, 받아들이세요'라고 조언하는 것에 있지 않은가. 연을 끊지 않고 사는 이상, 연을 끊으려는 각오가 없는 이상 해결책은 진부할 수밖에 없다. 해결책은 획기적인 대화법, 색다른 주장이나 시도가 아니다. 



3.

'타인의 무례함을 참지 마세요'라는 건 좋은 주장이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거기에 몇 마디 문장을 덧붙여야 한다.


하나는 <무례함에 당당히 맞선 당신의 의견은 곧 무시될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부드럽게, 아주 훌륭한 대화법을 사용하여 의견을 제시하면 상대방 역시 우아하고 올바른 태도로 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구는 자기계발서의 주문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런 기대가 순진하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위인들이 수천 년 전에 증명한 바 있다. 그 기대를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며 분노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너도 다를 바 없잖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무례함을 참지 마세요'와 같은 문장에 매료된 사람들, 즉 자신의 생각은 옳고(나는 예의바르다) 타인은 틀렸으며(저 사람은 무례하다) 그러니 이걸 내가 상대방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특히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타인에게 자신이 믿는 도덕ㅡ너도 '나처럼' 참아, '나처럼' 양보해, '나처럼' 내 이야길 들어줘ㅡ을 강요하게 된다. 


얼핏 보면 너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닌가? 변화시킬 수 없다면 뭐하러 맞선단 말인가? 이것은 합당한 대가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합리적인 이성 측의 주장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잘 살펴보면 현명한 조언자는 거의 대부분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는 것은 이성적인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다.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성인이라 믿는 이들의 말씀이다.



4.

독신이 많아지고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두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난 이들이 신시대의 종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걱정거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것이야 말로 독실한 종교인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시대 종교인들의 독신 생활은 전통적인 종교인들과는 다르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경제적인 판단의 결과물일 때가 많다. 이리저리 따져보면 결혼 생활이란 결국 손해이니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녀를 갖지 않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오늘날 무례함에 맞서라는 조언,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 및 윤리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대개 그곳엔 나만 손해볼 수 없다는, 대가라는 이름의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보상이 관철된다. 우리가 착하게 사는 이유는 선행을 보답 받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상대방에게 상냥하게 구는 그렇게 하면 상대방도 우리에게 상냥하게 굴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대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한다.


손해보고 싶지 않아 결혼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만일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좋은 반응을 기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면 회의주의처럼 보일 것이다. 왜 상대방이 '자신처럼' 도덕적으로 선하게 반응할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되는가?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모두를 아우르는 도덕의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고, 기준을 세우더라도 인간은 부도덕하고 악한 면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선량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악한 자를 선하게 대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신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남편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가끔씩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방에 틀어박히는 남편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을 위대하다 칭송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만일 사랑이 이런 형태로만 움직인다면 사랑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저 사람이 언제나 나만을 위해 애쓸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한 생각이기도 하다. 저 사람이 가족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할 때가 있는 개인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그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관계의 희생양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항상 선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엔 도덕성의 강요가 숨어 있을 때가 많다. '넌 착한 아이지?'라는 주문에는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해야 해'라는 기대와 암묵적 강요가 서려 있다. 


상대방이 나약하고 부정적이며 거친 사람일 수도 있다고 간주하는 것ㅡ이것은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단점을 포용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자세에 불과하다. 예수는 그가 내 오른뺨을 때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지 않았으며, 부처는 우리가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가 아니다. 결국 조언의 이해는, 그 조언의 내용이 아니라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할,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을 우리가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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