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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적 모욕의 시대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9. 3. 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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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 지을 곳을 알아볼 때 흔히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명당이다. 이 자리는 명당이라 집을 짓기에 좋고 어떤 자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흉지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명리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의 이야기다.


오늘날의 '현대적인' 어떤 건축사무소에서는 풍수지리를 근거로 집 지을 곳을 추천해 주기도 한다. 예로 4면이 도로로 둘러싸인 택지는 고립되었으니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아 좋지 않고, 삼거리에 면한 택지는 도로가 건물을 찌르는 모양새라 재산이 급격히 사라지고 비명횡사의 화를 받을 수 있어 좋지 않다고 조언해 준다. 강이 인근에 있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라서, 강이 둘러싸듯 흘러가는 택지가 길하고 그 반대는 나쁘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꼭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태교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면 아이의 성품이 온화해지고 머리가 좋아진다는 주장처럼 그럴듯하게 들린다. 모차르트는 세기의 천재였고, 그 천재가 만든 그 음악은 재기발랄하면서도 차분한 데가 있었으니 천재가 만든 음악을 계속 들려주면 아이에게 좋은 영향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택지가 도로에 둘러싸여 있으면 차의 위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삼거리의 문제 역시 차가 집으로 달려드는 형상이니 차의 위험성을 감안하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따라서 풍수지리학, 명리학, 작명학, 태교학, 관상학과 같은 학문이 과학적 실증 없이 '그럴듯한' 수준에서 머무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그러한 주장들이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에 결정론적 세계관을 심어 줄 우려가 있다는 점은 문제로 삼을 만하다.



2.

알고 보면 원리는 간단하다. 평탄하고 느리고 사적 공간이 보장되면서도 열려 있으면 좋은 것이다. 반면 경사가 있고 급하며 갇힌 형국이면 나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이고 평범한 감성과 육체적 편리에 근거한 것이라 진리처럼 보인다. 관상학, 태교학 같은 것도 그렇다. 보기에 아름답고 좋은 것이 대체로 좋은 관상이며, 흉터가 있거나 찢어지거나 균형이 맞지 않거나 하면 대체로 나쁜 관상이다. 태아에게 들려줄 음악도 부드럽고 느리며 차분할수록 좋고, 강하고 빠르며 변화가 무쌍할수록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같은 현상을 두고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사면이 도로로 둘러싸인 택지를 흉하다고 하지만 반대로 길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방이 도로라는 방벽으로 차단되어 있으니 외부의 화가 쉽게 범접하지 못하는 형국이라 해석하면 된다. 삼거리의 흉을 복으로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다. 삼거리란 기운이 모이는 곳인데 집 앞으로 그 기운이 모이고 있으니 앞에 나무 하나만 심어 놓으면 나무가 흉을 대신 받고 길을 나누게 되어 결국 집에 복이 쌓이게 되는 형상이라고 풀이하면 된다. 이것뿐일까. 부드럽고 차분한 음악이 태교에 좋다고 여겨지지만, 그런 음악이 아이를 일상적인 만족과 만성적인 게으름에 빠지게 하여 아무런 목표와 열정이 없는 아이로 크게 할 우려가 있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보긴 매우 어렵다. 어떤 현상에 대한 그럴듯한 해석이 있을 뿐으로, 천둥이 치거나 가뭄이 지속되면 하늘이 노한 것이므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했던 고대 샤머니즘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들리지만 그때 당시엔 세상의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그럴듯한 사상이었다.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은 인간이 원초적 두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라 타당한 면이 없을 수가 없다. 문제는 원시 종교와 같은 이런 주장들이 그저 자신만의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런 생각들은 평생 불릴 이름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외모의 품평에 영향을 미치며,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아이의 탄생과 그 성별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우리 조상들은 아들을 원한다는 이유로 방금 막 태어난 셋째 딸의 이름을 '말자[末子]'로 지었고, 아이 낳는 굿을 치렀으며, 가임기 여성에게 '구기자[子]'를 먹였다. 그래서 외모가 못 생겼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평생 문전박대했으며, 선천적인 불구자들은 천벌을 받은 자들이라 하여 외면하였고, 특정 지역의 사람들을 불길한 땅에서 태어난 불온한 자들이라 하여 모욕하였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에서는 경복궁의 위치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했다. 범인이 보기에도 뒤에는 멋진 산이 떡 버티고 있고 그 앞은 평지이니 살기에 좋아 보인다. 하지만 그저 '살기에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명당이라 땅의 신령스러움이 인간을 이롭게 해준다는 해설이 붙는다. 그런 대단한 명당인데도 왜 조선 전기에 경복궁 내에서 숱한 피바람이 불었는지, 왜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몇백 년간 폐허로 남았는지, 왜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이후 몇십 년 만에 나라가 망해버렸는지에 대해선 함구한다.


이런 '그럴듯함의 맹신'은 우리나라가 문명화되었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성행 중이다. 그래서 이사 갈 때 여전히 '손 없는 날'을 챙기고, 결혼을 할 때 사주팔자를 확인하며, 땅을 살 때는 풍수지리적으로 길한지를 살펴본다. 강도의 상, 사기꾼의 상을 따지는 일은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외모를 품평하고 저 사람의 코가 재산이 나갈 상인지 아닌지를 들여다본다. 아이가 뱃속에 있으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이가 커나갈 땐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조차 꺼리며, 아이의 이름이 물과 궁합이 안 좋으므로 수영은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3.

나도 좋아하는 색깔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도 있다. 그래서 그 색을 보면 기분이 차분해지기도 하고 그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들뜨기도 한다. 여기에 과학적 근거를 대기는 어렵다. 우리에겐 감성에 지배되는 부분이 있으며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므로 개인에게 국한되어야 한다. 내가 파란색을 보면 기분이 좋고, 붉은색을 보면 피가 연상되어 기분이 나빠진다는 이유로 파란색을 길한 색, 붉은색을 흉한 색으로 정할 권리는 없다. 


천둥이 치면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며 나도 그러하다. 천둥소리가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는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감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천둥소리를 신의 분노로 간주한 뒤 천둥이 치면 머리를 조아리며 제사를 올리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감성의 문제는 사람을 외부적으로 지배하고 만다. 그것은 결코 그 사람 내부에서 그 사람만의 취향으로 갇혀 있는 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외모는,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고향은, 우리의 사주팔자는, 우리의 묏자리는, 심지어 우리의 현생은 음양오행과 사주라는 기이한 전통에 의해 평가되고 만다. 


누군가 우리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놀린다. 단순히 촌스러운 것을 넘어 때로는 사주가 흉한 이름이라고 저주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정한 것도 아닌 이름에 고통 받는 우리는 '내 이름이 촌스럽다거나 팔자가 사납다고 하는 것은 너희의 편견일 뿐 거기엔 아무런 근거가 없어'라고 말할 사고력과 자부심이 부족하다. 우리의 정신은 그런 공격에 쉽게 망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그들의 주장에 맞도록 길하게 바꾸는 선택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남의 집에 찾아가 불길한 지세 위에 집이 지어졌다며 혀를 차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가족의 건강이나 아이의 명운에 해악이 찾아올 거라는 저주의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집 주변에 가축 폐사장이 있다거나, 시멘트 공장이 있다거나, 사용 중인 지하수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감사의 말을 전하도록 하자. 하지만 명당이나 풍수지리를 언급하면서 주변 계곡으로 복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거나 주변에 있는 강이 세차게 흐르며 좋은 기운을 내쫓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까닭 없이 불길해질 것이다. 생각해 보니 처음엔 웅장해서 화를 막아준다 생각했던 주변 산세가 험악해 보여 점차 기분이 나쁠 것이고, 강이 세차게 흐르던 것도 기운이 왕성하기보단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기분에 쉽게 지배 받고, 그에 좌우되며, 심지어 자신의 그런 기분을 토대로 다른 사람도 그에 따를 것을 강요하고 만다.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그런 기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데 아주 능숙하니, 이는 결국 연관된 사람들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4.

내가 과학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편견을 없애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오컬트나 신비주의에 관용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편견을 심어주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부분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져 바꿀 수 없는 것ㅡ주어진 이름, 주어진 성별, 주어진 외모, 주어진 피부색, 태어난 시각, 태어난 곳의 지세, 태어날 당시의 별자리, 선천적인 질병 등ㅡ을 두고 평가를 내리는 결정론적 편견이다. 그 편견엔 근거가 없고 애초에 반박조차 불가능하여 반증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오컬드와 신비주의는 우리의 삶에 심각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애초에 참과 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오컬트에 한 번 빠지면 과학적 사고가 정립되지 않는 한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사고가 보이는 관용적, 해결사적 태도도 이들을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이들은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묏자리만 옮기면, 굿만 하면, 귀신에게 제사만 올리면, 부적만 붙이면, 집터만 옮기면 당장에라도 해결될 것처럼 군다. 그들은 고통에 처한 사람들, 고민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과학적 사고가 나타나 신비주의를 비판할 때 겪는 가장 큰 고초 중의 하나가 그 감정선에 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준다잖아. 뭐가 문제야?" 


이 음악을 들으면, 이 약초만 먹으면, 이것만 구입해서 끼고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신비주의의 환상은 그들의 고객을 위로해 준다. 반면 과학적 사고는 나타나서 자꾸 비난을 가한다. 우리의 마음은 위로에 가까워지고 비판에 멀어진다. 과학적 사고는 신비주의적 망령은 단순한 허울이고 듣기 좋은 선전이여서 곧 가짜로 밝혀질 것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비난만 가할 거면 '꺼지라'는 비난을 과학적 사고에게 돌려준다. 


"넌 갑자기 나타나서 비난이나 했지. 넌 부정적 사고의 원천이야. 너와 있으면 머리가 아파!"


이것은 과학적 사고를 모욕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한편으로 그 사고는 알고 있는 것이다. 진실의 문은 언제나 좁은 길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은 거룩한 길일 뿐 행복의 길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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