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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나의 인생, 나의 학문>, 주석을 달다 (1), 그리고 반친영제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2. 2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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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고학 및 미술사 연구에 매진했었던 삼불 김원용 교수를 알고 있는 인물은 이제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 고고학과 미술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드물 뿐더러, 그가 한창 학계에서 일하며 글을 기고했던 것이 어림잡아도 40년 전인 20세기 중후반인 데다가 그가 타계한지도 이제 25년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의 수필집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그가 쓴 거의 모든 책이 절판되어 도서관 보존서고가 아니면 읽을 수도 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의 수필을 읽었다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된다. 


김원용 선생이 쓴 글의 매력이 무엇일까? 대부분 솔직함이 매력이라고 말한다. 읽다 보면 참으로 솔직하게 글을 쓰셨구나, 하는 대목들이 있다. 소변이 마려워 담벼락에 볼일을 봤다거나, 화장실 바닥에서 개미를 살펴보다가 마침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마주치는 바람에 치한으로 오해를 받았다거나 하는 글이 그렇다. 너무 솔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수필의 정의에 딱 맞는 글일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거나 비난받을 만한 대목들이 있지만 6~70년대라는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 같은 건 읽어서 뭐에 쓰나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진리가 여기 있소' 하고 내세우는 책에만 가치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전과 판매에만 열을 올리는 속 빈 강정들이 더 많다. 허술하게 나아가다가 갑작스레 던져지는 유머와 성찰이 수필의 매력 아니겠는가. 기억에 남는 몇 가지 단락들을 순서대로 옮겼다.



1.

"최근에는 몇몇 정말 유능한 젊은 고고학자나 미술사학자가 나타나게 되어 (...) 과거의 내 논문들 잘못을 하나하나 들추고 두들기고 나서기 전에 어서 죽어 버리는 것이 사실은 더 행복할지 모르고 (...)"


ㅡ 그의 솔직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정도 되는 대학자는 보통 자신의 업적에 자부심이 있어서 자신이 쓴 논문에 잘못된 점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는 글 이곳저곳에서 겸손을 보이고 있었다. 



2.

"나는 남과의 약속을 어기면 잠이 안 오고 그래서 남 때문에 사느냐고 마누라 야단 맞지만 (...) 반대로 남이 약속 안 지키면 사람 같지 않고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다."


ㅡ 사람을 대할 때, 특히 배우자를 고를 때 잘 알아야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관계에 있어 이기적인 사람을 피하고 이타적인 사람을 선택하라고 배울 텐데, 이타적이라는 것이 꼭 우리에게 좋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예로, 남과의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이타적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사람에겐 보통 일관성이라는 게 있어서ㅡ위 예시에서처럼ㅡ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그는 남 역시 시간을 잘 지킬 바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에겐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집안 청소를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는 당신에게도 청결을 강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근검절약하는 사람을 칭찬할 테지만 그는 당신에게도 인색하게 굴 가능성이 높으며 당신이 돈을 헤프게 쓴다며 따질 여지도 있다.


그러니 배우자가 될 사람이 게으른 편이라고, 혹은 말수가 적다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게으름을 부리거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문 채 인상을 쓰고 있어도 그는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3.

"노인이 되면 별다른 의미에서 세상 만사에 애착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세상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이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자기 떠난 다음에 남을 사물들에 대해서 감상적인 기분으로 되는 것이다."


ㅡ 이런 감정은 이룬 게 많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피해갈 수 없다. 노인을 여러 가지 관점으로 정의할 수 있을 텐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물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일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참으로 맞는 말이다.



4.

"요사이 젊은 교수들이 벌거벗고 교정에 나가 테니스를 하고 축구하는 걸 보면 실망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교수란 연구와 강의에만 정열을 쏟으면 그 이상의 건강법은 없는 것이며, 성실한 학자일수록 백학처럼 깨끗하게 장수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ㅡ 요즘 시대에 이런 말을 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그는 상아탑이 존경 받던 시대의 마지막 인물일 것이다.



5.

"6월 16일(1950)에 여기 사택에서 장녀가 출생했다. (...) / 철석처럼 믿던 국군이 쉽사리 붕괴되고 이틀 만에 중앙청 위의 깃대가 바뀌고 보니 허무 맹랑한 감,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 재빨리 피난한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나 대부분의 시민들이 유기된 어린 아이 모양으로 어리둥절한 채 27일을 맞이했다. / 나 자신은 산후 일주일밖에 안 된 처자를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지만 피신 갈래야 시내에서는 갈 곳도 없었다."


ㅡ 한국전쟁의 일화가 등장하는 단락이다. 위 단락 이후, 서울에 남아 있던 그가 경복궁 창고 안에 있는 유물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애쓰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는 당시 박물관 직원이었기에 사명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하면 보통 전쟁 자체의 양상만 생각하게 되는데 그 아래에서 참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졌다. 모르면 몰라도 헐리우드 영화 <모뉴먼츠 맨>의 일화가 유럽만의 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6. 

"최근에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 착륙할 때면 끄집어 내서 저송하는데 옆에 앉은 양인들이 차이나 맨이 무얼 저렇게 중얼거리나 이상한 눈초리로 넘겨다볼 때도 있지만 '야아 가만 있거라, 너희들이 내 덕분에 무사하단다'라고 속말로 타이러주곤 한다." 


"해방 직후 결혼을 해서 처가에서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묵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이라야 같은 서울 시내에 있으니 "자 갑시다" 하고 성큼성큼 대문 밖으로 나가다 보니 장모와 처가 마주 서서 훌쩍거리고 있다. (...) 내가 무슨 심청이를 끌고 가는 뱃사공과도 같고 왜 그런지 몰라도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 지금에도 아이들이 까닭 없이 잘 울고 못난 티를 보일 때면 "그 놈의 유씨를 닮았나" 하고 야단을 치는데, 그럴 때마다 안방에서 "저런 혹독한 사람인 줄 예감이 들었기에 집 떠날 때 눈물이 나왔지, 뭐야" 하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ㅡ 학자라 하면 꼬장꼬장한 융통성 없는 교수를 떠올리기 쉬운데 삼불 선생은 꽤나 유쾌한 분이셨던 것 같다. 이런 단락들을 보면 그렇다. 맘만 먹으셨다면 움베르토 에코 못지 않은 희극을 써내셨을 것이다.


ㅡ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저자가 혼인 후 처가에서 며칠을 머물렀다는 부분이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도 17세기까지는 처가살이가 흔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친영제, 즉 신부가 신랑의 집에서 혼인식을 하고 그대로 신랑의 집에 머무는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지지 않았다. 영조는 친영제가 잘 정착되지 않자 사대부의 결혼에는 반드시 친영제를 시행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친영제는 끝까지 수용되지 않았다. 대신 반친영제, 즉 신랑이 처가에 며칠을 머물다가 신부와 함께 시댁으로 가는 절충안이 17세기 이후 자리잡게 되었다. 이 역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풍속이 되었지만 해방 직후엔 살아 있었음을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반친영제는 이후 서양의 결혼 제도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남자쪽에서 집을 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남녀평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세태에서 보자면 어린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결혼 초창기에는 신부측의 집에서, 아이들이 장성한 이후에는 신랑측의 집에서 지냈던 조선 전기의 살람 방식은 참으로 괜찮은 풍속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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