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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2012)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3. 1. 2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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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관심있게 읽은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난 빵집 주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빵집 주인은 내게 한 가지 현실적 모습과 한 가지 초월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1. 현실적 모습: 그는 자신에게 케이크를 주문했으나 찾으러 오지 않았던 주인공 부부에게 홧김에 장난전화를 한다. 그리고 장난전호를 따지러 온 부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든 지 사흘이나 지난 케이크를 가지러 오셨다 이거지? 그게 다지요? (...) 상해가는 그 케이크는 저기 있소. 원래 부른 가격의 반값에 주겠소. 아니오. 당신들이 원하잖소? 가져가시오. 나한테는 아무 쓸모 없소, 누구한테도 쓸모없소. 저 케이크를 만드느라 나는 시간과 돈만 낭비했소."(137쪽) 그러나 부부가 케이크를 찾으러 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자 곧바로 반성하고, 그들에게 장난전화를 한 사실에 용서를 구한다. 빵집 주인의 저런 모습은, 전화로 거칠게 나왔던 사람도 막상 찾아가서 이야기하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알고 보면 모두 착한 사람이라는 일화를 확인시켜준다. 나는 그런 사실을 종종 목격하며, 내가 그런 입장에 처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빵집 주인의 모습은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초월적 모습: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막상 그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빵집 주인은 부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두 가지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부부 아들의 죽음과 돈을 받지 못한 케이크는 별개의 것이라거나, 또는 자신이 전화로 부부에게 장난을 걸긴 했지만 그것은 부부 아들이 죽은 지 몰랐기 때문이라며 항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빵집 주인의 모습을 가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를 죽이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당신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기고만장해질 테니."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며, 나 역시 그럴 때가 많았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빵집 주인은 다른 태도를 취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것뿐이라오.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140쪽) 이런 빵집 주인의 모습은 보통 사람에게서는 보기 힘드니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빵집 주인의 행동에서 느낀 두 가지의 조금은 상반된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 소설은 빵집 주인의 행동에 힙입어 따뜻하게 마무리되는데, 다른 식으로 결말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그것을 앞세워 반성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자신의 잘못만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때 상대방이 누릴지도 모를 그 이기심과 오만함을 걱정하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의 잘못보다는 상대방의 들보가 먼저 나타나 그를 지적하고 싶은 욕구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 나에게 소설 속 빵집 주인은, 비록 그가 "먹고살자고 이 안에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일"(138쪽)하며 "그저 빵장수일 뿐"(140쪽)일지라도, 그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성인처럼 느껴졌다. 난 앞으로도 (어쩌면 오랫동안) 그 두 상반된 감정으로 인해 혼돈스러울 것이고, 그 양 감정 사이에서 오고감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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