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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코네 (1) - 하코네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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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껏 몸을 위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추구하는 여행은 끊임없이 걷고 오르며 자연을 쫓아가는 여행이었으므로 따스한 태양이 내리쬐는 지중해의 누드비치에 누워 눈요기를 한다거나 한여름에도 실내 온도가 24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열대의 화려한 빌딩 숲에서 점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쇼핑을 한다거나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도쿄라는 대도시를 여러 번 여행하면서도 박물관이나 도서관을 제외한 대형 건물에는 아예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난 흔히 휴양하면 떠오르는 행위와는 거리가 매우 먼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 온천이라는 목적지를 넣은 것은 아내를 생각해서였다. 아내는 여행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그리 매력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는데 특히 도쿄를 유독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오사카나 교토와는 달리 도쿄는 한 나라의 수도로, 흔히 서울과 비슷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경향이 있었다. 가득 들어찬 빌딩, 숨막히는 교통,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 미적 감각을 찾기 힘든 난개발...... 아내도 천성적인 모험가 스타일의 여행자였으므로 도쿄라는 뻔한 이미지의 대도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후지산에 올라가는 건 어때?"


역시나 아내의 눈은 도쿄가 아니라 그 인근을 돌아다녔다. 후지산에 한 번쯤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추억이 될 터이지만 몇 년 전 후지산을 등정할 때 정상부에서 날 괴롭혔던 고산증이 떠올랐다. 후지산에서 무슨 고산증, 하며 산소통도 챙기지 않은 내 탓이 컸지만 어쨌든 주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3700미터쯤 되니까 백두산보다 훨씬 높아. 게다가 뭐 볼 것도 없어. 화산재에 뒤덮여서 황량해."


고산증에 대한 염려와 화산재 말고는 볼거리도 없다는 나의 말에 아내는 후지산 등정을 포기하는 듯했다. 그럼 어디를 가는 게 놓을까? 아내는 도쿄에 이것저것 볼거리가 있다는 설명에도 도쿄를 마뜩잖게 생각했다. 사실 도쿄는 서울과 비슷하지만 매우 다르기도 했다. 겉에서 보이는 표층은 유사하나 심층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도쿄에 들렀다가 후지산 인근에서 온천을 즐기는 경로를 생각해 냈다. 아내는 후지산 외에 온천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도쿄 인근에 그에 딱 맞는 여행지가 있었다. 바로 '하코네'였다. 낮에는 일하랴,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아이와 놀아주랴 힘든 아내에게 온천이라는 휴식은 매력적으로 느껴질 게 분명했다. 하코네에서 후지산도 보고 온천도 즐길 수 있다는 말에 그제야 아내는 '기대'라는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여행기간 동안 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시기로 한 덕분에 계획은 금세 짜여졌다. 하코네의 경우 도쿄 신주쿠역에서 '로망스카'라 부르는 특급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비싼 값을 치러야 하긴 했지만 기왕 하코네에서 쉬기로 한 거, 제대로 쉬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일반 열차를 타면 종점인 하코네유모토 역까지 한번에 가지 못하고 오다와라 역에서 갈아타야 했다.


로망스카에는 중장년층의 일본인 승객들이 많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객차의 승객들은 모두 일본인으로 보였다. 이 일본인 승객들은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는데 부산하게 떠들며 한 젓가락씩 하는 모습이 다소 신기하게 느껴졌다. 보통은 조금 있다가 먹지 않나? 우리는 어쩌면 후지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나름의 여유를 만끽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 기차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20분 정도의 출발 지연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이 기차가 종점인 하코네유코토 역까지 가지 않고 오다와라 역에서 멈춰서 버린 것이다. 우리는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에야 우리도 내려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환승 없이 바로 가기 위해 탄 로망스카 열차가 일반 열차처럼 오다와라 역에서 멈춰서 버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승무원들의 태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안했다. 나는 내가 티켓을 잘못 끊었거나 잘못된 정보를 알아온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아내에게 이 사태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승무원들, 특히 다른 승객들의 너무나도 평온한 반응은 나에 대한 아내의 신뢰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상한데, 로망스카 타면 분명히 한 번에 가는 게 맞는데...... 아닌가? 왜 아무도 항의를 안 하지? 내가 뭘 잘못 알았나?"


너무나도 순종적으로 움직이는 승객들의 반응에서 무엇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떠올리기는 불가능했다. 그제야 난 열차 목적지가 애초부터 '오다와라'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다음 정차역을 표기했거니 생각했던 게 실은 종점이었던 것이다. 난 승무원에게 다가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물어보았으나 승무원은 손가락으로 다른 열차를 가리키며 어서 그 열차로 갈아탈 것을 종용할 뿐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막스 베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남아 기차를 이용해버린 실수에 대한 벌일까? 나는 환승 열차가 우리를 남겨둔 채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서둘러 붉은 색의 하코네 등산 열차에 올라탔다. 다행스럽게도 열차 안에 좌석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적지 않은 수의 승객들은 열차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대한 캐리어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남은 한 손으론 천장의 손잡이를 꼭 쥐고 있어야 했다.


일본 열차 시스템에 대한 극심한 불만과 회의는 하코네유모토 역에 도착하자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승무원 일부가 개표구 앞에 선 채 로망스카 티켓을 구매한 승객들에게 환불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심약한 나는 구름이 잔뜩 낀 하코네의 우울한 분위기와 한 시간 넘게 늦어버린 도착 시간, 그러한 불운이 가할지 모르는 결정론적 회의론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 공연히 일본 열차 시스템을 찬탄했다.


"이야,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환불을 해주네! 역시 일본은 선진국이야!"


난 하코네유모토 역을 빠져 나가기 전에 매표소에 들러 내일 출발하는 로망스카 열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스, 액시덴도. 저스토 투데이. 투마로우 노 푸라부럼!"


역무원의 대답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하코네의 공기를 시원하게 뚫고 지나갔다.


출발이 20분 넘게 지연되었으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들어오는 한량, 로망스카 GSE. 도쿄도 신주쿠구, 2018. 5.24.


오다와라 역에서 갈아 탄 등산열차.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2018.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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