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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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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 한 달은 무척 어렵지만 하나의 업무 프로세스가 완전히 순환하는 일 년을 견디고 나면 그럭저럭 할만하게 된다. 다음 일 년은 지난 일들의 반복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막내를 벗어나려면 일 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그래도 보통 일 년 정도 지나면 슬슬 후배도 생기고 일에 자신감도 늘고 뭔가 할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요지는 익숙함이다.  


처음 혼자 아이를 보게 되었을 때ㅡ자신감 빼면 시체인 나이지만ㅡ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아이와 단 둘이 있다는 것, 아이와 단 둘이 외출은 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고 그래서 그 모든 경험을 되도록 유예시키보려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늑장에도 한계는 있는 법. 하나둘 겪어나가다 보니 막연한 걱정이 느긋한 태연함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생경하던 것에 익숙해지고 노련해진다. 아이의 떼쓰기에도, 아이의 울음에도, 추운 날 작은 집에서 심심함에 몸부림치는 아이와 단 둘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익숙해진다는 건 좋은 것이다. 익숙함은 어느 정도 나를 해방시켜준다. 예를 들면 더러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이는 천성적으로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방바닥에 과자를 문지르다가 그것을 먹기도 한다. 나는 방바닥이 깨끗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처음과는 달리 이제 그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 일이 벌어지는 걸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몸이 하나뿐이고, 따라서 내가 설거지하거나 요리를 하는 동안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가 바닥에 흘린 걸 다시 주워먹어도, 아이가 신발로 내 옷을 쓸어내려도, 아이가 마트의 카트를 손으로 만지고 얼굴을 비비더라도.


하루는 아이가 변이 묻은 손으로 집을 더럽히기도 했다. 기저귀에 변을 보고 난 뒤 엉덩이가 간지러웠는지, 기저귀 안에 손을 넣고는 긁어댄 것이다. 이불은 물론 방바닥 위에도 황금색의 변이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이는 변이 묻은 손으로 내 태블릿을 가지고 놀다가 방으로 들어온 나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아이는 변이 더럽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득 치매에 걸리면 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씻기고 더러워진 방을 닦느라 꽤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언젠가 벌어져야 할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벌인 온갖 저지레를 뒤처리하듯, 방바닥을 나뒹구는 서랍 물건들을 정리하듯 난 그렇게 방을 닦고 옷과 이불을 빨았다. 그리곤 맘카페를 뒤적거리며 내 선배들의 조언을, 성이 다른 그들의 하소연을 나의 것으로 남몰래 치환시켜 나갔다.



2.

오늘도 아이는 방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다리를 붙잡고는 의자 위로 기어오르려 한다. 아이는 내가 책상에 앉은 채 무언가 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끝끝내 내 몸 위로 기어오른 뒤 컴퓨터 키보드와 마우스를 빼앗고야 만다. 일단 그 지경이 되면 키보드를 내가 다시 차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이가 스스로 흥미를 잃을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할 뿐. 하지만 나에게도 대처법이 생겼다. 아이가 의자 위로 기어오르려 하면 거실로 나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럼 아이는 거실로 달려와 내 몸 위로 기어오른 뒤 그 책도 빼앗으려 들지만 그래도 키보드 때처럼 아주 적극적이지는 않다. 아무래도 책은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 덕분에 책은 그런 대로 읽어나갈 수 있다. 요즘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 있다. 책장이 얇은 편이라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이는 이 빨간 책을 빼앗으려 몇 번 시도하다가 곧 내 품에서 빠져나간다. 예측 가능한 익숙함.



3.

일이라는 게 그렇다. 일 년 정도 지나 익숙해지면 슬슬 자신감이 생겨난다. 그리고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자만심도. 그래서 새로운 생각과 의견에 눈과 귀를 닫게 되고 이제 그 위로 서서히 태만이 쌓인다. 솔로몬이 말했듯 지구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으니, 내가 아이를 가장 잘 안다는 생각도, 아이는 이렇게 키우는 게 맞다는 편견도 생겨난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익숙함은 그렇게 돌고 돌아 회상과 망각이라는 그 오랜 순환을 오늘도 반복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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