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익숙한 길

by solutus 2017. 10. 16. 11:53

본문

아파트 내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이어 나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 에코 마일리지에 가입하라는 구청의 안내 방송이었다. 조용한 집안을 잠식하는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아이는 벌떡 일어나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난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작은 침대의 난간을 붙잡은 채 서서 울고 있었다. 난 부엌에서 키친 타월 한 장을 뜯은 뒤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것으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그러고 두 팔로 아이를 안아 올린 뒤 거실을 서성였다.

아이는 진정이 된 듯했다. 아이를 안은 채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아이는 싫은 소리를 냈다.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아 보았다. 아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장난감을 향해 기어갔다. 난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책을 집어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거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가끔씩 내 모습을 살피며 장난감에 열중했다. 손뼉을 치기도 하고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낱말을 연이어 흥얼거리기도 했다. 한번은 두 손으로 작은 공을 잡은 채 내게 내밀었다. 난 내게 공을 건네려는가 싶어 비슷하게 팔을 뻗어 그 공을 받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두 손에 힘을 꼭 준 채 공을 놓지 않았다. 나는 팔을 거두었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한 번 공을 건넬 듯 팔을 뻗었다. 그러나 여전히 손에 힘을 준 채였다. 아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웃자 아이가 따라 웃었다.

한동안 거실을 기어다니던 아이는 그새 싫증이 났는지 의자에 앉아 있던 내게 다가왔다. 아이는 내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더니 내 허벅지 위로 올라오기 위해 기를 썼다. 난 아이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잡아 밀어올려 주었다. 아이가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 난 책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손과 발을 어루만져 주었다. 피부가 차가웠다. 발을 주물러 주는데 아이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고 싶어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몸을 느슨하게 기울이자 아이가 거실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때 아파트 내부 스피커에서 다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이번엔 아파트 주차장에서 장터가 열리는 걸 알리는 방송이었다. 이번엔 아이가 울지 않았다. 

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주인공 파트릭이 자신의 과거를, 부모를,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었다. 딸의 출생 신고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던 이 소설은 어느덧 자신의 세례 증명서를 받아가는 중반부에 접어들고 있었다.  

"내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내 기억력은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점령기 파리에서 살았던 것을 확신한다. 당시의 어떤 인물들, 자질구레하면서도 마음을 뒤흔드는 세세한 일들, 그리고 어떤 역사책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송이 나왔다. 106동 앞에서 에코 마일리지 설명회를 하고 있으니 들으러 오라는 안내였다. 마침 아이는 집안의 것들에 서서히 싫증을 내고 있는 터였다. 나는 옷을 갈아 입은 뒤 아이를 품에 안았다. 현관문이 열리자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이와 내가 떠올리게 될 기억, 가을이 점령한 도시의 세세한 풍경이 우리의 두 눈으로 들어왔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