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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가까웁게 잔혹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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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은 운전할 때 라디오를 켜둔다. 항상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리를 키워 음악을 듣곤 했던 반-음악인 시절에도 워크맨의 라디오 버튼을 누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때 난 오로지 음악이 듣고 싶었을 뿐 사람들의 수다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워크맨이나 휴대전화의 음악 재생 버튼이 아니라 라디오 버튼을 누른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노래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휴대전화의 음악이 졸음운전을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래서 라디오 디제이가 선곡하는 예측할 수 없는 음악 목록에서 일종의 긴장을 부여받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라디오 채널 <배철수의 음악 캠프>는 내게 다소 실망스러운 프로그램이었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노래를 선곡할 때가 많아서 신선하다는 느낌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딥 퍼플, 건스 앤 로지즈, 퀸, 오아시스, 드림 씨어터(드림 씨어터는 좀 의외이긴 했다), 심지어 비틀스에 레드 제플린까지. 아주 가끔 들을 뿐이었지만 그런 우연들이 겹치자 난 <배철수의 음악 캠프>를 '올드한' 노래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저작권료 때문일까? 옛날 노래들은 아무래도 저렴할 테니까.' 난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저녁, 장을 보러 마트로 차를 몰았고 평소처럼 라디오를 켰다. 역시 <배철수의 음악 캠프>였고 역시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마트에 차를 주차할 때쯤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그리고 듣기에 좋았다. 주차를 끝냈지만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몇 차례 곡이 이어질 동안 계속 앉아서 들을 뿐이었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 대한 하나의 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장 그르니에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하기에 적절한 순간이었으리라.


"나는 새롭게 여겨지는 것에서 단조롭기만 한 면을 발견해 가는 중이었으니......"[각주:1]



2.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는 하늘은 어둡고 집들은 칙칙한 우중충한 도시에서 <보로메 섬으로!>라는 간판을 단 꽃가게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그 간판을 보는 순간 이탈리아 북부 마죄르 호수에 떠 있는 세 섬이 눈앞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보로메 군도의 섬들이 누구나 칭찬할 정도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섬들이 당시의 혹은 예전의 그가 품었던 상념에 걸맞은 풍경을 안겨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소하고 미약한 인간 군상들이, 일정하게 떨어진 채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운명 지워진 그 섬들의 처량하고도 아름다운 모습과 닮아 보였기에. 우울한 도시 분위기는 그런 자극을 더했음이 분명하리라.



3.

주차장에서 한동안 듣고 있었던 음악들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 듣는 내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장 그르니에가 보로메 섬을 떠올렸던 순간에 대해 말하는 수밖에.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ㅡ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ㅡ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각주:2]



더 멀어질 수도, 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저 끝없는 반복...... 

이토록 잔혹한, 이토록 가까웁게 잔혹한 것이 우리들의 숙명이었다.



4.

"제가 주차장에 앉아 멍하니 들었던 곡 중에 하나죠. Harry Styles의 Sign of the Times입니다."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섬> (민음사 2003), 173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175~17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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