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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다 (1)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7. 6. 2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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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행복하고자 결혼한다. 다른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데도 굳이 결혼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의 어떤 조건을 보았든 혹은 보지 않았든 간에 결국은 대체로 행복할 것 같기 때문에 결혼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당연하게도 '행복'이다. 즉 우리는 우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거나 '선(Good)'을 달성하기 위해, 혹은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다. 


이렇듯 행복은 도덕에 관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행복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은 선을 구분해내지 못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지지만 맛있는 음식이 꼭 건강한 음식은 아니듯이. 이미 칸트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과 선한 사람을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이며 (...) 행복의 원리는 윤리성을 기초 짓는데 전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각주:1]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은 나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조언이나 모범이 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우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게 끝나곤 하는 이유가.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어떤 실수를 했을 때, 혹은 어떤 결점을 보였을 때, 그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를 보다 올바르게 만들어 줄 상대방의 조언이나 지적이 아니다. 그 지적이 궁극적으로 옳은 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지적이 우리를 행복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가령 우리가 아내나 남편에게 회사 동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은 "험담은 나쁜 것이야. 그 사람의 좋은 면을 생각해 보자"라는 조언이 아니다. 만일 그 혹은 그녀가 우리 감정에 대한 적절한 동의 없이 곧바로 그런 조언을 해버린다면ㅡ그 말이 아무리 부드러운 억양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ㅡ그 말은 우리를 다소 언짢게 만든다. 그 말이 궁극적으로는 옳으며 차후 우리를 더 완전한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 놓을지라도 그 말은 적절하지 않게 느껴진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그런 기대를 하고 결혼을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혼 생활에서 바란 것은 우리의 행복이었지 선의 실천이 아니었다.


그렇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원했지, 당장 선한 인간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순간 그들이 바라던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여 스스로의 선을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주변 사람들의 꾸짖음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닥친 이 불행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공감과 유대를 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종종 '잘난' 소리를 해버리고 말았다('그들'과 '우리'의 위치가 바뀐 걸 이해해 달라. 우리는 때로 피해자였지만 종종 가해자이기도 했으니).



2.

우리는 감정을 최대한 통제한 채 논리로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배운다. 감정은 내비추지 않아야 하는 부적절한 것으로 배운다. 우리의 설득 방식도 상대의 감정에 기대기보다는 논리에 집중되어 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논리적인 방식으로 합당하게 대화하고 이성적으로 수긍하길 바라지, 감정에 휘둘려 비약을 하거나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쏟길 바라지 않는다. 


분명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상대방에게 비인간적인 것을 요구하라고,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을 끌어내라고 가르쳤다. 아주 단순하게, 감정을 차분하게 유지한 채 우리의 모든 생각을 논리회로에 집중하면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라 가정했고 그래서 그렇게 교육했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런 가르침은 우리 인간 관계에 일종의 법정을 세웠다. 차분하게 발언하고 정확한 증거를 내밀며 합당한 주장을 펼치면 명판결이 내려질 거란 기대를 하며. 하지만 실은 실제 법정에서도 감정은 설득으로 가는 중요한 요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3.

물론 의아할 수 있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이성으로 대화하면 금방 좋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텐데 왜 굳이 감정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현인들, 성인들의 대화에서나 벌어질 수 있다. 그런데 성인이라면 오히려 상대방의 감정을 살펴 가며 대화할 것이다. 상대방은 자신처럼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이 관점을 결혼과 행복에 관한 우리의 관심으로 확장할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하는데, 만일 그 행복이 선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 아닌가?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문제가 부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 자녀들이 보기에 부모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부모는 자신들이 옳은 말을 해주는 데도 자녀가 말을 듣지 않은 채 마냥 불행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잔소리와 반항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각자의 정의와 도덕을 무기로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상대방을 제대로 정복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상대방이 어린 자녀처럼 대항력이 떨어진다면 일시적으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체가 발달하면 곧 강력한 해방전쟁을 일으킨다. 무력으로 억누르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힘이 없어져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이런 가정이 행복할 리 없으니 이제 결혼과 자녀는 불행의 원천으로 회자된다.



4.

행복을 원하되 선을 원하지는 않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복잡한 과정 없이 곧장 올바른 결론으로 가면 가장 쉬운데 왜 우리는 이토록 감정의 이해와 자기 행복의 원리를 거쳐 빙 돌아 '궁극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주말에 집에서 빈둥거리지 말라는 아내의 이야기는, 쓸데없이 남의 흉이나 보고 다니지 말라는 남편의 조언은,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은 공부를 하라는 부모의 충고는 너무나도 옳은 말인데도 상대방은 왜 곧장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인가? 오, 아쉽게도 우리는 언제나, 지금 당장, 우리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원대한 목표는 분명 그런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향해 있지 않지만, 그 목표는 평생을 걸쳐 달성해야 할 과제이지 우리의 현재 모습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자기 행복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ㅡ아이러니하게도ㅡ우리는 관계 속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가 기존의 딱딱한 관점을 유지한 채 행복해지는 유일한 비결은 관계를 멀리한 채 고독해지는 것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의 감정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인간의 감정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고. 이성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그런 건 위대한 자들의 몫으로 놓아두자. 우리의 결혼 상대는 완벽해진 채 온 게 아니라 불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왔으며, 그 불완전함은 배우자가 행복을 선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완성되었다. 그 인식은 올바른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잘못이지 우리 배우자의,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1.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IV 443 B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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