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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아와 함께 비행기를 타면 몰상식한 부모라는 주장에 관하여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7. 6. 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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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잘 아는 지인이 흥미로운 글을 보내왔다. 영유아가 비행기에 타면 고막이 파열된다는 주장을 담은 글이었다. 이 글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1. 주장이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2.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어떤 통계나 논문이 없었고, 3. 주장하는 방식이 과격하여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는데, 4. 그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자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유아가 비행기에 타면 고막에 큰 손상을 입게 되고 나아가 평생 후유증을 앓게 된다는 주장을 한 가칭 A라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영유아가 있긴 하다고 썼다. 그러나 "제 글을 읽고서도 영유아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부모들은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며 그런 부모의 자식들은 장애인 티켓을 예약한 셈"이라는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영유아가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험악하게 조성하고 있었다. 만일 비행기를 탄 영유아가 고막에 평생 후유증을 앓게 될 확률이 10만 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식의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즉 A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아이가 고막에 병을 앓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에 지나친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럼 그 근거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A는 어떤 근거와 통계도 대지 않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정확히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느 청각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전문가이니 자신을 믿으라고만 할 뿐이었다. 세상사를 현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은 이 대목이 무엇과 비슷한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소위 찌라시, 주식 사기, 사이비 신앙, 대체요법, 뉴에이지 심리요법, 최면 등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런 점을 지적하는 독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독자에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전문가가 알려줘도 뭐라고 한다', '통계가 뭐가 중요한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래서 안 돼' 같은 비논리적 대응을 퍼붓고 있었다.

 

그들에게 통계나 근거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실일까? 내 주변에는 비행기가 추락할까봐 두려워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게도 주의를 당부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이다. 물론 비행기가 때때로 추락하기도 한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확률이 약 540만 분의 1[각주:1]이라고 해도 두려움에 떨어야만 할까? 그 확률이 무척 낮은데도 불구하고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망할 수 있다는 제 글을 읽고서도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부모들은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며 그런 부모의 자식들은 사망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주장을 허용해야만 할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썼듯, "모든 사람은 통상적 질병이나 범죄를 경계하지, 누구도 걸린 적이 없는 질병을 경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각주:2]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어떤 일에 주의를 당부하는 것과, 혹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절대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장자 A가 자신의 강도 높은 주장이 받아들여지길 원했다면 장애 발생 가능성이 적어도 몇 퍼센트는 된다는 걸 근거로 제시해야 했다. 숫자로 표현을 못 한다면 대강이라도 짐작을 할 수 있게끔 해주어야 했다. 그것도 불가능하여 단순히 막연한 우려를 전하고자 했다면 표현을 완화해야 했다. 하지만 근거는 대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자식이 장애인이 될 거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주장인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질 거라는 일부 종교의 무시무시한 관점과 무척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A 때문이 아니라 그 말에 동조하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타면 추락해 죽을 수 있으니 타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해 주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식의 주장이 다른 형태로 공포를 조장하자 (이런 형태의 공포는 거의 대부분 건강, 수명,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그 동조자들 역시 하나 같이 자신의 경험에만 의지한 채 자신이 속하지 않은 편에게 일방적으로 독설을 내뿜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 광경을 토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여러 형태의 사기들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그런 이들의 특성 중 하나는 상대가 합리적인 이해를 구할 때 그에 대한 정당한 답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심하게 반발하며 그를 비논리적으로 깎아내리려 한다는 데에 있다. 난 때때로 한쪽의 근거 없는 말을 믿은 채 쉽게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을 (특히 인터넷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행동 패턴에 비추어 보면 그들은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쉽게 믿음을 주는 사람들과 비슷했다. 그들의 순진성은 때론 천진난만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며 그래서 부드러운 미소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천진난만함은 묶여 있는 개에게 돌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처럼 무감각한 폭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아이가 돌을 참 잘 던진다고, 나중에 야구를 시켜야겠다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2.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과 동류가 아니라고, 적어도 '아니었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비극적 아이러니에 처해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1. "A crash course in probability", (The economist, Jan 29th 2015), by B. R. [본문으로]
  2.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372b, 27 [본문으로]</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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