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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문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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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거주할 때 문진으로 쓸 만한 돌을 찾아 해변을 서성이곤 했다. 책을 독서대에 놓고 볼 땐 별 문제가 없었으나 책상의 상판에 내려 놓고 볼 때는 책장을 무언가로 누르지 않으면 책장이 저절로 반대쪽으로 넘어가곤 하여 적당한 문진이 필요했는데, 난 문진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조그만 돌로 대체하고자 했다. 나는 책을 읽은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구박을 받더라도 책장의 안쪽 끝을 손으로 눌러 접지 않았고, 그 때문에 빳빳함을 유지한 책장은 제 혼자 힘으로 반대편을 향해 넘어가곤 했다. 내 책의 그런 상태는 사람들의 좋은 표적이 될 때가 많았다. 마치 SNS에 올라온 행복한 사진 몇 개가 그들의 인생 전부로 파악되듯 타인의 서재에 놓여 있는 책들은 서재 소유자의 지식 그 자체로 인식되곤 했던 것이다. 따라서 SNS에 올라온 사진들이 행복했던 찰나의 순간을 담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하듯, 사람들은 타인의 서재에 가득한 책이 아직 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려 했다. 이것은ㅡ결코 벗어날 수 없는 눈의 착시현상처럼ㅡ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더라도 떨칠 수 없는 비교강박의 비애였다. 난 여전히 책을 길들이지 않았고, 덕분에 사람들은 안도했으며, 동시에 내 지적허영을 비웃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난 문진이 필요했다.


해변에서 문진으로 쓸 돌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해변의 돌들은 대부분 작거나 얇았고 그래서 문진으로 쓰기엔 너무 가벼웠다. 하지만 그나마 깨끗한 돌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해변이라고 여겼기에 난 돌이 많이 깔린 해변을 보면 땅에 눈을 박은 채 발부리로 이곳저곳을 흐트려뜨리고 다녔다. 


그러다 이 돌을 발견했다. 너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밑바닥이 평평하여 책장에 올려 놓을 수 있고 나름의 특색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어 심심하지 않은 돌. 옆에서 보면 두꺼비를 닮기도 한 이 돌은 검은색의 현무암이었다. 제주도 해변에서 얻은 현무암이라 내게 더 의미가 있었다. 이 현무암의 특색은 마치 소금 덩어리처럼 내려 앉은 하얀색의 결정질들이었다. 많은 현무암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 하얀 덩어리가 낀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단순 모래가 아니라 현무암 위에 내려앉은 석회조류의 흔적일 것이다. 이 현무암은 해변에서 아주 오랫동안 굴러다녔는지, 한쪽 면이 아니라 사방의 모든 면에 석회가 단단히 박혀 있었다. 수백 년 뒤, 어쩌면 이 현무암은 자신의 검은 빛을 잃고 온통 하얗게 변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책장 한쪽 위에 돌을 올려두었다. 돌의 오랜 세월이 그 위로 나직하게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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