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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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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연애편지도 잘 쓸 거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시절 난 급우들(대개 학교에서 소위 좀 '논다'는 아이들)로부터 연애편지를 써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곤 했다. 그들은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며 여러 글짓기 대회에 나가 입상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글과 연애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연애편지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들의 인식은 컴퓨터공학과 출신은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의 고장난 컴퓨터를 완벽하게 고쳐내리라 믿는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컴공과를 졸업한 내가 컴퓨터의 모든 문제를 고쳐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실력과 연애편지를 쓰는 실력은 무관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들, 특히 한 통의 편지로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면이 나오곤 했으니(심지어 어떤 여성은 편지를 읽다 감동에 북받쳐 기절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환상이 오롯이 그들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실에는 과장이 없다. 글을 아무리 잘 쓰더라도 이름만을 알고 있는 상태로는 그 어떤 여자의 마음도 '진실로' 사로잡을 수 없다. 화장으로 꾸민 외모나 목청을 가다듬은 노래로 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글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이(특히 시인이라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목적의 연애편지를 바란 것이었을까? 하지만 난 그런 용도로 글을, 그것도 연애편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설령 내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난 연애편지 같은 건 잘 못 써." 


그들은 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도 완곡한 거절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으리라. 후에 그들은 다시 나를 찾아와 편지를 다 써주기 어렵다면 자기가 쓴 것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까진 거절하기 어려워 몇 번 봐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풋사랑에 첨가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들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남의 손을 빌려서까지 상대에게 잘 보이려 하던 가상한 마음이 전부였으니, 난 기껏해야 문장이나 다듬어 주고 말 뿐이었다. 실은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자세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난 그들 사이에 끼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연애 시도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만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면 그들은 그때 내 탓을 하지 않았을까.


"글 잘 쓴다더니 순 엉터리잖아!"


엉터리. 이유를 떠나 그 말만은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넓은 골대를 지키는 골키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키커가 페널티킥을 차면 아무리 훌륭한 골키퍼라도 대부분은 막는 데 실패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어려운 승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골키퍼를 쉽게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가 페널티킥 앞에 선 현실의 골키퍼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만다. 그리하여 고장난 자동차를 고치지 못하는 자동차공학과 학생은 곧 엉터리가 된다.


이곳저곳에서 엉터리라는 이름의 축구공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어렵사리 받아낸 뒤 우리팀 공격수를 향해 힘껏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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