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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시각, 표절, 태도의 가능성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7. 2.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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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검도 국가대표선수가 한국에서 몇 달간 검도를 하며 느꼈던 소회를 장문의 글로 남기고 갔다. 사진을 뺀 텍스트만 A4용지로 10장 정도되는 글로, 단편소설 한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여성 검객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그녀가 남기고 간 그 글의 번역을 부탁받아 조금씩 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검도회보 2017년 봄 호에 번역글이 실리게 될 것 같다. 그런데 한 회분에 모두 싣기에는 글이 꽤 긴 편이라 중간에 편집이 되거나, 아니면 여름호에 걸쳐 글이 올라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을 앞두고 어떻게 번역을 하면 좋을지, 번역 방향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번역은 원문에 충실할 것이냐, 아니면 가독성을 좋게 할 것이냐로 방향이 크게 나뉘는데, 난 본디 가독성을 좋게 한 번역을 선호했다. 이것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thank you'로 번역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좋은 번역보다는 적절한 번역,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독성이 높으면서도 그 분위기에 맞는 번역을 좋아한다는 뜻이며, 필요하다면 'Look before you leap'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로 번역하겠다는 뜻이다. 눈이 내리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눈처럼 하얀'이란 말을 직역해야 했던 옛 선교사의 어려움을 난 조금 더 슬기롭게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프랑스의 16세기 시인인 에티엔 돌레는 <플라톤의 대화>편의 일부를 잘못 번역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책과 함께 화형을 당했다. 오래전부터 번역이란 잘 해도 메아리에 불과한 일이라 여겨져왔고 최근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역서마저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니, 번역이란 참 고된 노동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내가 하려는 번역은 문학이나 종교, 실용서가 아니라 일상어로 쓰인 수필에 속했다. 따라서 내 번역은 직역주의자들 관점에서 실수로 여겨질 만한 것들, 예를 들어 원문에 없는 표현이 있다 하더라도 관대한 처우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아프리카의 여자 국가대표선수가 남긴 글은 한국에서의 좋은 추억에 관한 것이었므로 저자 역시 내가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다 주는 번역을 하기보다는,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다 주는 번역을 해주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2.

이향이 쓴 <번역이란 무엇인가>(살림, 2008)와 모 대학교 영문학과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해당 박사학위논문이 정당한 인용표기 없이 책의 여러 부분을 거의 그대로 '붙여넣기'하는 표절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네트워크는 방대해"라는 말을 던지며 끝이 난다. 난 매일매일 그 방대함에 놀라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이미 출판된 책의 인터넷본과 한국교육학술원의 DB에 올라 있는 박사학위논문을 읽어 보다가 표절 사실마저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표절논문의 저자는 그 방대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표절이라는 유혹에 빠지게 되었으리라.


"네트워크는 방대해."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다시 한 번 해주고 싶었다. 직접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그곳 현지 사람들의 말을 직접 들어야만 '진짜' 정보이고,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정보는 한낱 '감'이나 '가십거리' 정도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계는 언제나 세계가 접하고 있는 각자에게만 열려 있는 법이었으니 다른 세계에 속하는 사람은 그 세계에 남도록 그대로 두어야 했다. 내가 행해왔던 첫 번째 실수는 언제나, 그들의 눈이 트이도록 만드는 걸 내 사명으로 여기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실수는 언제나, 내가 예수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인품을 갖추지 못한 채 설득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성인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너의 시각 역시 너에게 갇혀 있다고. 아니, 그런 말은 성인이 아닌 범인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했다.


이 세상은 이론보다는 증명을 원했고, 이상론자보다는 이론가를 원하며, 철학자보다는 차라리 수학자를, 그리고 수학자보다는 공학자를 원했다. 이미 세상의 규칙은 상당수 정해져 있었으니 내가, 설득력이 부족하고 인품도 부족한 내가 단순히 말을 통해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번역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난 언제나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오려 시도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완강히 저항하는 그들에게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그럴수록 그들은 나를 거부했고 날 밀쳐냈다. 난 그 태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난 내가 옳은 소리, 좋은 행동을 하고도 손가락질 받는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아무리 정정해주려 노력해도 결국 날 국외자로 치부하는 것에, 날 차디찬 방 안에 남겨둔 채 곧잘 돌아서버리곤 하는 것에 역정이 났다.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문득 번역의 일에 이르러 하나의 생각이 미쳤다. 그건 내가 선호하는 번역이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다 주는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난 아프리카인에게 '눈처럼 하얀'이라고 번역하는 대신에 '목화처럼 하얀'이라고, 독자의 시각에서 번역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난 평소에 그걸 잊고 있었다. 그런 번역처럼, 난 그들에게 그런 번역처럼 다가가야만 했다. 가독성을 위해 원문을 훼손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더라도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설득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난 그 세계를 그의 것으로, 하나의 의미 있는 실체로 온전히 남겨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3.

그 사람에게 맞춰, 그에 맞춰...... 아마도 난 오래도록 날 설명하지도 않고, 굳이 오해를 풀려고 시도하지도 않는 아무렇지 않은 인간, 한밤의 아이들로 남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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