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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는 배려심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10. 3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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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별 성격이 근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회자되는 것은 그 혈액형이 드러내는 성격들의 대비가 상당히 눈에 띄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우리는 먼저 성격이 섬세한 사람과 무던한 사람을 나누고, 거기에 성격을 종잡을 수 없거나 막무가내인 사람을 덧붙인다. 이렇게 네 가지의 커다란 틀을 만든 뒤, 그 틀에 자신의 성격과 상대의 성격을 대입해 비교하기 시작한다.

 

이 성격들 중 가장 심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 섬세한 성격과 무던한 성격일 것이다. 여기서 섬세함이라는 단어는 곧 배려심과 연결되고, 무던함 역시 곧장 무신경과 연결된다. 그래서 배려심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로 이야기는 확대되고, 결과적으로 혈액형을 매개로 하는 성격의 구분은 상처받는 배려심과 무던한 무신경이라는 관계의 대결로 번진다. 

 

이때 상처받는 쪽은 거의 항상 섬세한 측, 다시 말해 스스로 배려심이 있다고 믿는 쪽이다. 이들은 자신이 남들의 마음을 내다보고 걱정하며 섬세하게 신경 쓰는 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 무던한 상대방 때문에 상처받게 되어, 결국은 그들이 주는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과 멀어지게 된다고 믿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류 중 한 명일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배려심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는 항상 상대적이고, 섬세함과 과민함의 구분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큰 문제는 섬세함이 배려심으로 둔갑하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섬세하다고 믿는 사람들 중 일부(혹은 대다수)는 그것을 상대에 대한 배려와 연관짓는다. 그리고 자신이 베푼 배려가 비슷하게나마 돌아오지 않을 경우 상처를 받거나,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무덤덤하다고 믿는 상대방을 멀리함으로써 그 상처가 결국 드러나도록 한다.

 

나도 이런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하지만 문득 배려심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나에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배려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진정 상대방을 배려해서 어떤 행위를 했다면 상대방이 그 배려를 받지 않거나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난 상처받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 배려가 인정받지 못해 상처를 받았다면 결국 그것은 상대를 배려하려 한 게 아니라 나를 배려하려 했던 것과 같았다. 내가 베풀었던 배려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셈이다. 어떤 보답이나 기쁨, 상대방의 인정, 똑같은 되갚음.

 

섬세한 마음을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배려를 베푸려 하는 사람은 어떤 인정이나 감사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게 마뜩지 않을 것이다. 왜 배려하는 쪽에서 그런 고통을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하는가? 그렇게까지 해서 내가 상대방에게 배려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하는 마음가짐이라면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그 마음가짐은 배려심이 아니라 섬세함과 과민함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배려심이라고 믿는 그 무엇을 거두자. 나 역시 그 자기중심적 섬세함으로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어왔는가.

 

배려심은 무엇을 바라는 행위가 아니다. 배려심은 상처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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