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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적 형태로의 예술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8. 31. 01:55

본문

1.

내 마음 속에선 예술의 범위를 넓게 보자는 인식과 소비적 형태의 유행을 예술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Cereal, Kinfork 같은 잡지를 통해 현대적 감성의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설령 그것이 자기 기만적 소비 행위라 할지라도 예술이 행하는 하나의 역할로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피하기 어려운 것은,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버리고 갈 책의 목록을 선정해야 하는 날이 오면 이런 류의 잡지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저울질 당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2.

내가 서점에서 이 잡지들을 힐끗 보았을 때, 아내는 이 잡지가 인스타그램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잡지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니까---잡지의 내용이 아니라---잡지의 표지가 그 옆에 놓인 커피잔이나 휴대폰 등과 함께 배경처럼 찍히곤 하는 인스타그램의 단골 서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설명을 뒤로 하고 이 잡지를 펴 몇 초간 눈길을 주었을 때 난 이 책에서 풍기는 심상찮은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터뷰성 기사, 카페 소개, 장비 사용기 같은 글뿐 아니라, 꽤 호기심이 생기는 주제를 단 흡입력 있는 문장도 엿보였다. 책의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사진 또한 범상치 않아 보였다. 


며칠 뒤 서점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우선 저번의 여운이 남아있던 이 잡지들, 즉 Cereal과 Kinfork를 들고 서점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사건이었다. 서서 대충 훑어 본 적은 있어도, 일부러 이런 류의 잡지를 골라와 서점의 의자에 앉은 채 읽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난 이 잡지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 잡지가 인스타그램 속 사진의 배경으로 쓰이곤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이 책과의 첫 만남에서 내가 느꼈던 기운은 그리 잘못된 게 아니었다. 사진과 수필이 거의 번갈아 등장하던 이 예술 잡지(몇 개의 글을 읽은 후, 나는 이것을 잡지에서 '예술' 잡지로 구분지었다)에는 기자가 상투적인 표현과 방식을 이용해 쓴 취재글뿐만 아니라, 전문작가가 쓴 것으로 보이는 수준 높은 글도 담겨 있었다. 잡지에 기고된 글은 보통 저자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편이다. 대개 '무슨무슨 편집부' 정도로 뭉그려 소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꽤 괜찮은 글도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자가 누구인지를 찾아 보었다. 그리고 곧 영어로 된 여러 자자의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예술 잡지는 번역서였다.


이 책에 수록된 글과 사진이 아마추어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며, 그래서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면이 있다는 것도 확실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록 앞에 '예술'이라는 단어를 붙여주긴 했어도) 잡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 역시 확실했다. 수록된 글은 수준이 높았고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아쉽게도 몇 개의 글과 사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것에서 영속성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 번 사로잡힐 순 있지만 두 번 이상 눈길을 주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거기엔 유행의 속성이 엿보였다. 유행은 서사를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매끈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듯한 기품을 자랑했지만, 옷장 속에 서둘러 숨겨둔 집안 잡동사니 같은 혼란스런 내막을 프레임 밖에 감추고 있었다. 난 이 예술 잡지의 글과 사진에서 자본주의의 냉혹한 규정 속에 살면서도 한편으론 수준 높은 감성을 지향하려 하는 독자들을 자극하고자 하는 저자들의 야심을 발견했다. 만일 이 예술 잡지의 표지가 어떤 사진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면 바로 그런 이유, 즉 현대 자본의 이중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독자들의 영적 욕구를 잘 파악한 저자와 편집부의 능력 덕분이었다. 그 욕구에는 예술을 통해 영혼의 위안을 얻는 작용이 고품격의 도도함과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우아한 옷차림에 고급 선글라스를 끼고 턱을 당당히 내민 채 걷는 모습에 귀족이 풍기는 아우라와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급 감성이 펼쳐져 있는 듯하지만, 그는 곧 커피숍의 의자를 바닥에 끌며 당기고, 자신이 먹고 남긴 음식과 그 주변의 식기들을 적당히 치우지 않고 지저분하게 남긴 채 떠남으로써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이 예술 잡지가 어떤 쓰임으로 사용되고 있었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클림트가 주축이 되었던 초기의 빈 분리파는 전시회 수익으로 세운 분리파 건물의 정면 입구에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예술을 펼칠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문구(루트비히 헤페지가 쓴 그 문구의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를 달았다. 이 잡지의 이미지는 그런 주장을 했던 빈 분리파의 아르누보 회화와 유사한 이미지를 풍겼다. 그 유사성은 아르누보의 양식이 아니라, 일상의 예술을 추구했으나 결과적으로 사치스럽고 화려한 이미지를 낳았던 그들의 결과물에서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잡지에 보이는 사진(이 잡지에서는 글보다 사진이 훨씬 더 유행을, 그리고 숨막히는 고정된 이미지의 속성을 품고 있다)이 어쩌면 빈 분리파가 주장했던 '그 시대'에 어울리는 사진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류의 사진에서 느끼는 이끌림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단조로움과 삭막함, 외로움이 어떤 방식으로 해소---해결이 아니라---되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3.

이미지는 빛난다. 디자인은 유혹한다. 우리는 그것에 감동하고 그 출발을 감성이라 부른다. 혹자는 더 과감히 예술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난 이 예술이라는 것의 속성에 다소간 혼란을 느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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