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레비스트로스의 글에 담긴 주제에 대한 해석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7. 19. 04:43

본문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저서 <슬픈 열대>로 유명한 인류학자이지만 민속학이나 인류학 외의 다른 분야에도 꽤 많은 관심을 보였다. 움베르토 에코처럼 레비스트로스 역시 이탈리아의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요청으로 해당 신문에 여러 번 시평을 남겼는데, 여기에 남긴 그의 글들을 보면 레비스트로스가 평소 사회 현상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라 레푸블리카에 남긴 시평들(이 글들의 모음집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출간되었다)은 모두 훌륭했는데, 그중 "푸생의 그림에 담긴 주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생각해볼 만했다.


레비스트로스의 "푸생의 그림에 담긴 주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그려 넣은 푸생의 그림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글의 주제는 에코, 즉 메아리로, 그는 이 메아리가 주체가 되는 여러 지역의 신화에 대해 서술해 나갔다. 그가 주목한 점은 메아리가 등장하 두 지역의 공통점과 차이점이었다. 그 두 지역은 아메리카와 유럽인데,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의 메아리 신화가 메아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유럽(서구 사상) 신화는 메아리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차이점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밝히고 있었다. 아메리카의 메아리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대화가 오가는 걸 방해하고 오해가 생기게 하며 그런 방식으로 피해자를 마비시키지만, 유럽의 메아리는 음악의 반향처럼 듣기 좋은 소리의 반복을 통해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내며 그런 방식으로 상대방과 교감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전설을 익혔을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은 유럽의 메아리가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부분이 수상쩍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스 신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에코는 헤라의 저주를 받아 상대방의 말만 따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저주가 있은 후 나르키소스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의 뒷말만 따라하다가 결국 버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에코와 나르키소스가 '어쨌든'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의 일화를 읽는 우리는 그 둘의 대화가 일방통행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누었던 에코와 나르키소스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다시 말하면 에코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르키소스는 에코가 자신에게 대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둘 모두에게 오해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149쪽)라고 썼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그들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의 의견대로, 한쪽이 어떤 대답을 하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대화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는 아메리카 신화의 메아리와 비교하면 유럽의 메아리는 상황이 긍정적이다. 레비스트로는 두 신화의 공통점도 서술한 후, 푸생의 그림이 이 두 신화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고 언급하며 글을 마쳤다.


그의 글이 그렇게 끝나버린다는 게 뭔가 아쉬웠다. 레비스트로스의 글은 독서를 마친 이후에도 나를 계속 끌어당겼는데, 대화 중 서로의 오해가 명백히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대화가 잘 진행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언급이 특히 그랬다.


끝없는 질문을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질문자를 마비시키는 대표적인 예로 어린이와의 대화가 있다. 미국의 코미디언 루이스 C. K.는 드라마 <루이>에서 자신의 대답에 끊임없이 "Why?"라고 대답하는 꼬마와의 대화를 소재로 콩트를 만들었는데, 이 상황은 상대방의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말(Why)을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아메리카 신화에서의 메아리의 반복과 비슷하다. 그것은 메아리의 부정적 묘사로, 대화자 중 한쪽이 일방적인 곤란에 처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대화에서 빠져 나오는 것들은 어렵지 않다.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대개는 문화와 지식의 격차 또는 차이)이 무엇인지 쉽게 보이기 때문이다. Why를 반복하는 메아리는 그저 순진한(혹은 순수한) 악당이기 때문에 대화 상대자는 질문하는 상대방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뒤 그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리스 신화에서의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상황, 즉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오해만 쌓여가는 상황은 잘 해결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위의 상황과는 달리, 유사한 세계관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며 점점 좋지 않은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끝내는 나르키소스가 에코에게 소리쳤던 그 말, "손 치워, 차라리 죽어버리겠다"의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니, 그리스 신화의 이 상황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의 그런 혐오스러운 반응은 급작스럽게 나타나는데, 에코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에게도 조금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그들을 혐오하는 나르키소스의 심성은 종국에 자기애 때문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수면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데, 이것은 그런 극심한 자기애가 결국 다른 이들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로 발현될 수 있음을 엿보여 준다.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반복하는 행위는 서로간에 오해가 없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인 것으로 포장되면서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비극적 죽음으로 끝나는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그 신화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상대방의 마음에 들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며 행하는 자기계발서의 조언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을 따라하라는 것이지 않은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흉내내는 것으로 처음에는 상대방의 호감을 살 수도 있으나(나르키소스도 처음에는 에코가 따라하는 말의 반복에 호감을 보였다) 그 처방은 곧 한계에 다다른다. 따라하는 행위는 상대방의 언행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동으로, 남을 지극히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쉽게 그런 행위에 유혹을 느낀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복제하려는 대상은 대개 자신의 가족, 친구,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많은 거장들이 이성 만능설에 의구심을 품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망각 능력이다. 이성 만능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반성을 가장 통렬히 해야 할 어떤 순간, 즉 '내 말이 맞아, 어떻게 내 말이 틀릴 수가 있지?'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엔 자신의 이성을 의심해 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문제를 끊임없이 메아리치게 한다. 어쩌면 망각은 하나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에코도 아니고 나르키소스도 아닌 바, 실은 그 둘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반복하는 에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데다가 종국엔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나르키소스를 보라. 그 둘은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여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쉽게 질투와 분노에 휩싸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사랑받길 원하는 우리의 모순을 닮았다. 이런 모순 탓에 피해가기 어려워진 우리의 운명이 푸생의 그림에도 잘 나와 있다.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외면하고 있는 에로스의 애처로운 표정 주위로 결코 승리자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의 숙명이 떠돌고 있으니, 사랑의 신조차도 사랑에서 시작된 그들의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