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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액자, 당신의 결혼 사진에 관하여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7. 17. 02:36

본문

1.

사진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벽이 걸릴 때에야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액자에 담은 뒤 (비록 미술관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집 한쪽 벽에 걸어 둔다. 그러나 그렇게 걸렸던 많은 사진들이 결국은 벽에서 떼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 사진들은 예술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혼 사진은 그렇게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렸다가 결국 치워지는 사진의 대표 주자라 할 만하다. 


일상의 상투성은 우릴 지치게 만든다. 상투성은 과거에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던 사진이 더 이상 어떤 영감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며, 심지어 자신의 미천한 취향을 드러내는 증거물처럼 여겨지도록 만든다. 이런 상투성은 곧잘 신혼 초부터 집안에 걸려 있던 커다란 액자 속 웨딩 사진을 공격한다. 사실 웨딩 사진이 지닌 상징성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습관의 반복에서 오는 무기력에 쉽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상투성은 신혼 초 혹은 결혼 전에 꿈꿨던 가정의 낭만이 그 이상과 결별하게 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결혼 후 갑작스러운 지진처럼 몰려오는 부부간의 갈등은 벽에 걸려 있는 그들의 행복한 결혼 사진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인식에 확신을 심어주고, 결국 부부는 그 허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벽에서 그 상징을 떼어낸다. 행여 여진이 계속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이 불행한 부부는 이제 그 사진이 생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날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상투적인 일상을 촬영한 것과 같음을 인정하고야 만다. 수준 미달로 판결난 사진이 벽에서 떼어지듯, 그들의 결혼 사진도 첫 시작 때 품었던 비상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그들만의 미술관에서 쓸쓸히 퇴장한다.



2.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그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예술성을 지녔다기보다는 예술이라 인정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똑같이 팔을 젓는 행위라 할지라도 어린 아이가 자기집 거실에서 휘젓는 것과 무용가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서 휘젓는 것은 다른 평가를 받는다.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옷을 입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장소를 옮겨 무대에 선다면 관람객으로부터 다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현대 미술관 바닥에 우연히 떨어져 있던 안경 하나가 설치 예술로 오해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즉 현대의 우리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물을 둘러싼 '액자'를 보고 그것이 예술 작품이라 불릴 수 있는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꾸준히 관찰된다. 액자라는 프레임이 그 안의 어떤 내용물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현상은 우리의 평범한 삶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도가 잘 잡히고 인물들의 표정이 살아 있는 멋진 사진이 아니라, 남이 보기엔 평범하다 못해 보잘것없는 사진을 액자에 담아왔으며 그것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벽에 걸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종의 경건한 의식이었다. 동방 교회의 이콘을 보며 화가의 기술적 숙련도를 따지지 않는 것은 애초에 그것이 단지 기예의 우열로 가려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당의 벽에 걸린 거대한 성화처럼) 사진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거는 행위를 할 때 그 사진은 촬영 기법이나 결과물의 기술적 완성도로는 따지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여행 중에 찍은 디지털 사진을 애써 인화하여 벽에 거는 행위를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아버지를 얕잡을 수 없었던 것은 그 행위가 지닌 바로 그 의미 때문이었다. 액자와 족자로 꾸며져 벽에 걸린 뒤에야 예술로 대접을 받는 작품들처럼 아버지는 우리의 일상적 삶 역시 그런 대접을 받길 원하고 있었다. 세상에 몇 안되는 행운을 지닌 특정한 인물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오직 소수의 몇몇 인물들(아마도 가족과 친구)에게만 기억될 것이니, 아버지는 프레임화를 통해 그런 기억이 특별해지길 염원한 것이다.



3.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결국 반발을 사게 되고, 특별해지길 원했던 기억들은 머지않아 벽에서 퇴출되게 된다. 사진은 우리를 상상의 이미지에 머무르게 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추억이 찍힌 사진을 비싼 액자로 장식해 벽에 걸어두었다 하더라고 실제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 액자는 단순한 이미지, 그것도 거짓 이미지로 남게 된다. 특히 결혼식 때의 웨딩 사진은 그 상투성에다가 부부의 불행한 삶까지 겹치면서 아주 쉽게 거짓 이미지로 매도당하고 만다. 그런 액자 이미지의 마지막이 단순히 벽에서 치워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좋은 결말이라 해야할 것이다. 심한 경우 액자는 깨지고 그 안의 사진은 찢겨진 채 바닥을 나뒹굴게 된다.


"가화만사성"이나 "사랑은 최고의 미덕입니다"와 같은 문장을 걸어둔 집에서 가정적 불행이 지속될 때, 그 가정은 경구에서 위안이 아니라 오히려 허위를 발견한다. 사진 이미지 역시 동일하다. 우리의 상처는 특별했던 날의 기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 평범했던 날의 일상으로 탈색시킨다.



4.

어떤 회의주의자들은 우리가 기억을 남기려는 행위를 낮은 자존감 탓으로 돌린다. 어떤 낙천주의자들은 우리에겐 미래가 있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또 어떤 심리학자들은 삶을 액자 형태로 남기려는 행위에서 자신에 대한 연민을 발견한다. 현세의 삶을 부정하거나 또는 그 삶이 그저 구원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는 일부 종교적 견지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을 특별하게 만드려 하는 모든 노력은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례의 모든 절차는 고인을 위한 부조가 아니라 결국 산 자를 위한 위안"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떠나갔다. 우리는 고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남은 자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걸 어떻게 얻을 것인가 하는 건 우리의 문제이며, 분명한 사실은 삶의 액자화가 그 위로에 한 축을 담당해 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벽에 걸려 있는 그 사진은 곧 버려질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에 다가올 어떤 위협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특별한 작품으로 남기고자 했던 그 끊임없는 열망이 오늘까지 우리를 지탱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남기고 그걸 액자에 담는다. 비록 액자 속 사진이 실망감에 버려지거나 세월 속에 잊혀진다 하여도, 더 먼 미래의 언젠가, 우리는 한구석에 박아놓은 액자를 우연히 발견하여 미소짓거나, 찢어버렸던 사진을 다시 맞추며 회환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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