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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에 관하여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7. 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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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눈은 사물을 흑백의 명암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예외일 경우는 우리의 눈이 빛이 사라진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이다. 저녁이나 밤에도 전기의 빛이 밝게 빛나는 오늘날의 세상에선 우리가 망막의 간상세포만을 이용하여, 즉 명암만을 인식하여 세상을 바라볼 일이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깊은 밤, 인적 없는 외딴 곳에서 자신을 에워싸는 으스스한 공포를 밀어내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별 관찰자들에게도 명암이 지배하는 세계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사실만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진의 세계에서는 심심찮게 그 명암의 세계와 조우할 수 있었다.


과거 흑백 사진이란 기술적인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벗어난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흑백 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이제 흑백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나 톰 디칠로 감독 등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도를 제외한다면)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흑백 사진은 그에 비한다면 훌륭히 살아남은 것이다. 컬러로 찍은 사진을 일부러 흑백의 톤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는 흑백으로만 찍을 수 있는 카메라와 앱이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촬영하고 또 모노크롬 변환을 적용하여 만든 흑백 사진을 (설명을 장황하게 덧붙이지 않는 사진의 전통을 고수하여 대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혹은 시간와 장소 정도의 단문을 붙인 채) 단독으로 화면에 올려놓는다.


'사진은 사실을 보여준다'는 명제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지 오래 되었다. 따라서 명백히 존재하는 사물의 색채를 없애버리는 그런 일련의 작업을 인위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이제 사진은 (이전의 회화 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환기시켜 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애써 그런 인위적 조작까지해가며 환기시키려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흑백 사진의 경우 대체로 비슷한 목적을 지닌다. 그것은 흑백 필름이 존재했던 시절의 과거를 연상시키고(이 사진은 그렇게 오래되었다), 밤의 어둠을 상기시키며(이곳은 빛이 사라진 세상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관점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이 피사체는 평범하지 않다)을 떠오르게 하려 한다. 그런 계단들을 거쳐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지는 비애감, 중후함과 같은 일련의 슬프고 고독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이런 류의 흑백 사진들이 거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사진들이 비치는 의도적인 강요 때문이다. 기술적인 한계가 있던 시절엔 몰랐거나 잘 알 수 없었던 그 유난한 의도는, 실제로 존재하는 색채를 일부러 제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은밀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작업은 눈물이 쏟아지게 만드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최루성 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 최루성 영화를 보며 마음껏 울고 싶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처럼, 사진 작가는 흑백이라는 이미지의 기술을 통해 자신과 감상자의 감정, 특히 비애, 연민, 고통을 해소시키려 한다. 그러나 흑백으로 찍은 자연의 풍광,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 적막한 골목길 등의 장면은 그 의도성 때문에 우리의 감정을 그저 잠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방류시킨다. 우리가 그때 느끼는 감정은 피사체와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찍힌 그 노인의 시름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흑백의 피사체를 통해 과거라는 추억과 어둠이라는 아픔을 우아하게 떠올리고는 자신에게 위로를 보낸다. 따라서 피사체는 그 대상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곧 생명력 없는 사물이 되며, 일방적으로 이용당하고 소비된다. 그렇게 즐거운 장면이 아니라 주로 애처로운 장면을 변환시키려 하는 인공적인 흑백사진은 타인의 아픔을 증폭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의심에 찬 눈길을 떨치기 힘들게 된다(그런 의미에서 즐거운 장면을 흑백처리하는 것은 좋은 허용이라 할 수 있다. 즐거움은 커질수록 좋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찍고 편집을 통해 치장하며, 때론 온갖 피사체에서 일부러 색채를 제거해버렸다. 아픔을 강조하는 그런 흑백 사진은 우연한 현실적 사건이 아니라 의도적이며 강렬한 우리의 개입을 전면에 대두시켰고, 결국 사진의 주인공이 고통스러운 피사체가 아니라 (그런 장면을 촬영한 곳에 존재했던) 우리 자신이라는 욕망을 은밀히 알리려 했다. 외로운 시대,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서 슬픔과 분노에 찬 현대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해소의 방법이란 셀카와 모노크롬이라는, 자기애를 향한 통속적인 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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