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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세계의 검도, 그리고 어떤 위안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8. 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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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일련의 세속화된 영적 훈련을 위해서 우리의 신체적 자아는 물론이고 심리적인 자아까지도 훈련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수련장이 필요하다." 나는 이때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 수련장이 지금 이 현대에 존재하니, 검도를 배워보시라고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이지만,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정신적 위로의 방법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중세의 시토 수도원과 같은 가톨릭 수련장이 현대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세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창설한 시토 수도원은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구역을 두었으니, 몸은 부엌과 숙소에서, 정신은 도서관에서, 그리고 영혼은 성당에서 돌보았다. 우리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정신과 영혼을 돌볼 곳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향락을 강조하니 몸과 마음은 점차 순간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게 되고, 이제 그 이후에 찾아오는 무력과 허무에 대처할 방도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랭 드 보통은 종교가 갖는 여러 가지 절차와 수단에서 도움을 빌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방법도 신체를 함께 훈련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기, 알랭 드 보통이 알지 못했던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검도라는 운동이다.


2.

나의 옛 검도 동영상을 보았다. 난 내 실력이 여전히 그대로 일거라 생각했는데 영상을 보니 분명 발전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실력이 과거보다 늘었다는 의미겠지만, 반대로 내가 내 과거 실력을 과대평가했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부분에서 내 실력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또 다른 어느 부분에선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만일 내가 훗날 더 높은 수준에 오른다면 내 과거 영상을 보고는 '내가 이때 이렇게 못난 검도를 했었단 말인가' 하고 놀랄 가능성이 높다.


이 질책은 대개 검도를 하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 시합에서 이겼는가 졌는가 하는 결과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 연습을 하는 모습에서, 간단한 대련 장면에서 나타나는 내 자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많은 검도인이 신경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검도는 자세가 중요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검도가 다른 무도와는 다르게 자세를 지극히 강조하는 이유는 검도가 선불교와 연관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포츠화된 현대 검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분명 검도는 종교적인 기운, 그리고 마음 가짐과 연관이 있다. 이 정신 자세는 단순히 인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를 대할 때의 모든 마음가짐과 연관이 되어 있다.


내가 단순히 검도의 포인트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난 과거의 내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포인트였으므로 영상을 빨리 넘겨서 점수를 냈는지 내지 못했었는지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합을 볼 때 나의 눈, 대부분의 검도인의 눈은 포인트를 얻는 바로 그 장면이 아니라 시합을 하는 전반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향한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즉 마음의 자세가 몸의 자세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검도의 핵심이며, 심지어 득점을 판단하는 기준에도 그 마음의 자세가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 있다.


3.

세속화된 세계에서 정신의 위안을 찾기 어려운 이때, 오랫만의 휴가에도 마음의 안정보다는 신체와 정신의 향락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이 마주한 난점이다. 검도는 그런 면에서, 비록 종교가 주는 위로보다는 덜할 테지만 그에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며 따라갈 수 있는 정신적 위안을 건낼 수 있다. 불교도는 명상을 하기 위해 좌선한 채 평온하게 숨을 쉰다. 그때 그들은 자신이 숨을 쉰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때 산만함에 빠지지 않은 채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체감하고 그를 극복하려 한다. 검도도 이와 비슷한 수련 방법이 있다. 매시간 운동이 끝나고 나면 잠시 묵상을 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물론 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난 직후의 묵상이기 때문에 불교의 좌선과는 달리 호흡이 거칠 것이고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테다. 그러나 현대인이 하루에 한 번, 그렇게 자신의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후 잠시나마 마음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건 무척 특별한 체험이다. 그 참선의 하루하루가 쌓여 훗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검도를 함으로써 적어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검도는 스포츠화되었고, 그래서 단순히 땀을 흘리려는 목적으로 도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세의 강조와 묵상은 이상하게 비춰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도장은 묵상을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검도의 자세에 관한 문제는 예외적이다. 단순히 상대를 죽도로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상대방에게 닿게 되었고 또 닿을 수 있었는지, 나는 왜 상대가 나를 죽도로 칠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는 것, 그 원인을 단순히 체력이나 근력에서 찾지 않고 마음가짐에서 찾으려는 것, 검도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도는 마음의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난 동영상에 보이는 내 모습에 또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 실망은 발전을 위한 좋은 징조에 불과할 뿐이다.


4.

명상에 들어가기 전, 불교도들은 먼저 앉는 자세부터 새롭게 배운다. 우리의 자아는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쉽게 걱정에 빠지고 관계에 대한 불안에 초조해하며 경계를 쉽게 풀지 못한다. 명상에 들기 위해선 이런 자아와 평온한 상태에 들어가려는 우리의 의식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듯한 자세를 유지한다. 자세는 이처럼 중요하다. 검도의 기본 자세도 처음에 취하려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하지만 오래 수련하다보면 그 부자연스럽던 기본 자세야말로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의식적인 자세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수련 끝에, 세계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검도인들이 말하는 '무심의 일격'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무심의 일격이라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자신도 모르게 친 하나의 타격을 말한다. 즉 그것은 무아의 상태에서 나온다. 이들 검도인들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들이 아닌데도 그런 말을 한다. 이것은 검도의 원천이 비록 종교 그 자체와 이어져 있지는 않을지라도 얼마나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불교에서 아나트만이라고 말하는 것 ,즉 무아의 상태에 들어가는 행위를 검도의 수련을 통해 이뤄내는 것이다. 아나트만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불교인들은 자신의 열정,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검도를 할 때 우리가 받는 요구, 즉 상대를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욕구를 버리라는 교훈과 맞닿아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자신의 자세를 망치며 죽도를 마구 휘두르면 결코 좋은 검도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에겐 "때린 뒤 반성하고, 맞은 뒤 감사하라"는 좋은 교훈이 있다. 상대를 쳤다고 기뻐하지 말고, 상대에게 맞았다고 좌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주변에 있다. 매일 이런 마음가짐으로 검도를 하다 보면, 검도인들은 신체적인 건강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안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

어쩌면 적지 않은 수의 검도인들이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검도는 스포츠이자 무도이며, 따라서 상대를 이길 수 있어야만 그 의미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 것이므로 그런 생각이 나쁠 것은 없다. 자신의 방법론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각자는 검도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무언가를 이루려 할 뿐이다. 어떤 이는 그 목적이 시합에서의 승리일 것이고, 어떤 이는 다이어트일 것이며, 또 어떤 이는 자신감을 기르기 위함일 것이다. 정신 수양이 검도의 목적이라고 말하기는 참 쉬운 일이다. 하지만 실천하기는 가장 어렵다. 앞으로도 나는 상대에게 맞지 않기 위해 나도 모르게 죽도로 머리를 막거나 허리를 숙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도 난 시합에서의 승리가 검도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시합에서의 승리만이 검도의 목적이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 세계의 정신적인 측면에서 위안을 얻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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