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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공범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6. 23.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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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 23일은 오키나와에만 적용되는 공휴일인 '위령의 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12만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강요에 의해 집단자결하거나 살해당했고, 그 비극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의 날'이라는 공휴일이 지정되었다. 작년 봄 나는 그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서 있었다. 그 공원은 단정하고 아름다워서 비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공원 한쪽에 세워져 있던 수많은 비석은 그저 공원의 상징물, 조각 장식 같아 보였으니, 그 앞에 꽃다발을 내려 놓은 채 말없이 서 계시던 할아버지조차 실은 흔한 관광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당시 내게 '평화'라는 단어는 '공원'이란 단어 앞에 우연히 위치해 있는 단순한 수식어에 불과했다.


2.

우리가 가장 쉽게 잃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는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걸 잃어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내 예우와 마지막 믿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사실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기는 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물론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하지만 그 연민의 감정이 진실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의 연민은 거의 모든 경우 자신의 내부를 향해 있었고, 따라서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것만을 토대로 할 때가 많았으며, 그 와중에도 상당수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거울 삼아 타인의 고통을 비춰보는 것에 실패하여 왔다.


또한 여기서 '실패'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머뭇거려진다. 실패란 도전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아픔을 비춰 타인의 고통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서 있을 때에도 우리가 거울을 통해 비춰보는 건 그저 자기자신의 얼굴이며, 우린 그저 곁눈질로 가끔씩 다른 사람의 모습을 힐끔거릴 뿐이다. 따라서 실패라는 결과물이 나타났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실패는 언젠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 다음 한 발자국엔 전진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실패가 아니라 전진도 후퇴도 없는 무관심의 주변을 서성였다.


바뀌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유혹도 통하지 않는다. 달콤한 유혹이 아닌 달갑지 않은 충고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더 이상 조언, 충고를 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 시대를 주무르고 있는 개인주의적 자유만능사상에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검도를 하러 온 어린아이들에게 아무리 기본적 자세를 강조해도 별 소용이 없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좋은 자세를 유지하는 데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왜 자세가 중요한지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몇 번 알기 쉽고 차분하게 이야기해주어도 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간절하게 느끼기 전까지, 그 아이들은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쪽 귀로 흘릴 것이다.


검도의 자세는 그 사람의 인생에서 보자면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의 정신 세계는 그가 취미생활을 하는 자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이 부차적으로 다루는 것은 단지 취미생활만이 아니었다. 이것이 나의 착각이라면 착각이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는 자세, 자동차를 몰 때의 태도뿐만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타인의 고통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우리들의 뻔뻔한 자기애적 연민에 대해 토로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기적인 태도로 비춰질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과 거짓 연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저 군자인 척하는 자가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런 주장을 늘어놓는지를 쑥덕댄다. 누군가 검도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얼마나 '잘났는지를' 뒤에서 팔짱을 낀 채 훔쳐본다. 오히려 증오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한 가지 사례가 나타날 때마다 남자를 비난하고, 여자를 비웃고, 지역차별 발언을 일삼으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세에서, 타인의 고통에서 멀어지며 자기애에 빠진다.


난 '우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가 <3기니>에서 지적했듯, 내가 말하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우리가 같은 집합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참혹한 전쟁 사진을 보면서 같은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진을 보고 어떤 이는 반전주의자가 되고 어떤 이는 오히려 보복을 외치며 전쟁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르다. 따라서 내가 쓰는 '우리'라는 표현은 사실 형식적인 존중을 드러낼 뿐이다. 울타리를 친다고 '우리'라는 동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분인 내 옆의 존재들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 그들이 옆에 있었다는 것에 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우리 낙천주의자들은 그 잠깐의 인기척을 상대방에 대한 큰 관심과 이해와 배려로 여긴다. 이런 손쉬운 생각은 서로 다른 우리를 '하나의 우리'에 묶어두고, 결국은 손쉬운 연민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존재야'라고 만족한 후 쉽게 잊는다. 타인에 대한 증오심을 여전히 두 손에 꽉 쥔 채로.


3.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르며" 그러므로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썼다. 연민이 어쩌다 그렇게 습관적인 행위가 되었을까? 잔인한 사진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이 고통에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고, 혹은 단순하게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줄 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런 비애감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환경적 요인이든 그 사람의 선천적 태도이든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자기기만적 태도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손택은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그런 숙제가 주어져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자신에게 빠져 있는 사람에게, 혹은 그 누구에게도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란 이미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과제를 모르니 해결할 수가 없고, 이제는 그것이 과제라고 알려주는 행위마저 주제넘는 짓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그 과제를 알려주면 우리는 묻는다. 그 숙제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왜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무거운 짐을 건네는 것이냐고. 


그렇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며, 그러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그저 적당한 방관자이자 동조자였다. 우리는 자신의 악의를 위로하고 포장해 줄 공범을 원했다. 적당한 칭찬, 적당한 무관심, 적당한 거리 유지.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4. 

난 그렇게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서 있었다. 맑은 하늘의 자연 조명 아래에서 멋진 구도를 찾고 있었다. 사망자 명단이 적힌 추모비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던 한 할아버지를 사진기로 잡으면서 멋진 장면을 포착했다고 좋아했다. 전쟁은 커녕 포화 속의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렇다. 우리들의 여행은, 인생은, 나의 삶은──그래서 희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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