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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도덕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5. 28. 03:28

본문

1.

우리는 대개 주위 사람들이 성실하고 합리적이길 바라며, 그렇기에 종종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그런 기대를 전달하곤 한다. 그러나 조언자에게 아직 권위와 연륜이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조언을 듣는 우리는 보통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지라도 내부에서) 반발을 느낀다. 그 반발의 주된 원인은 그런 말을 하는 조언자 역시 항상 성실하거나 합리적이진 않기 때문이며(즉 자격 없는 자의 조언), 또한 그것이 불필요한 간섭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며 이성은 완벽하다는 주장을 내려 놓은지 오래 되었다. 신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내려왔던 그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 인간보다도 밑에 있는 무언가로 더 내려온 상태이다. 온정주의가 사라지고 윤리관이 위협 받으면서 이제 그 누구도 섣불리 상대에게 도덕이란 기준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상대가 항상 완벽하기를, 항상 합리적이고 성실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다. 우리와 논쟁 중에 있는 상대방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이 해본 적 없는 것을, 게다가 (항상 옳은 것은 없다는 회의주의적 견지에서 보았을 때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편파적 시선으로 우릴 설교하려 들 것이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상황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대의 우리는 무적의 논리처럼 보이는 걸 갖게 되었다. 그것은 '너나 잘해' 혹은' 너가 뭔데'라는 자유주의적 도발이다.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만이 강조되면서, 법에서 강제하지 않는 도덕적 규범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그저 선택적인 사항으로 전락하였고, 그 와중에 태생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은 그 불완전성에 스스로 머무르는 방식으로 눈앞의 난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따라서 사실상 위의 도발적 질문에 벗어나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대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도덕적 조언이란 남에 대한 불필요하고 자격 없는 참견이 되고 말았다. 이런 세태는 직접 본 적도 없고 가깝게 연관된 적도 없으며, 상대방의 이름, 나이, 성별, 직업 등을 알 수 없기에 윤리적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인터넷상에서 더욱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2.

지금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혐과 여혐의 대결 구조는 여러 원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들이 보기에 남성들은 스스로 항상 합리적이지도 못하면서 여성들에게 합리적이길 강요하고,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은 항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감정만을 파고든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런 갈등들은 육아, 직업, 군대 등 사안마다 관점이 달라진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하는 자세다. 조언을 할 때와 받아들일 때의 마음가짐이 거의 예외 없이 달라지듯, 우리는 상대의 말 중에 옳은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찾는 데 더 특화되어 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므로 상대의 그런 결점을 쉽게 찾아내게 되고, 그런 결점 많은 인간이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에 커다란 분노를 느낀다. 우리의 입과 손가락에선 '너나 잘해' 혹은 '너가 뭔데'라는 말이 쉽게 뛰쳐나온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완벽해 보이는 도발적 질문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엔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너가 뭔데'라는 질문은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해 주었을지 모르나, 그 조절되지 않는 분방한 자유의 대가로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잃어버린 무언가는 바로 남혐과 여혐의, 그리고 세대 갈등이나 지역 갈등 같은 끊이지 않는 여러 갈등의 실타래를 풀어낼 실마리였다.



3.

우리는 건전한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파편화된 개인들이 주체가 된 이 세상은 이제 자신 외에는 통제와 간섭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우리는 그 상황에 만족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가 갈등과 불행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자신을 바로 잡아줄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갈등들이 진작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따뜻한 공동체에 언제 소속될 수 있을지, 그 공동체가 항상 나에게 관대하고 친절하며 공정할지엔 의문 부호가 따라다닌다. 가족간의 관심마저도 불필요한 간섭으로 치부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나면, 그런 공동체의 탄생을 마냥 기다리긴 어려워 보인다. 그럼 해결책은 무엇일까? 난 불가지론자이지만 어쩌면 종교가 그 해결책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 위에서 누군가가 날 항상 감시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현세의 나의 태도가 나의 구원과 윤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강제해 준다. 우리가 인간에게는 '너가 뭔데'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신이 내려준 규정의 석판을 가리키며 감히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의 석판 대신 성문법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들을 위한 조화로운 해결책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종교와 철학이 그간 큰 발전을 해온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면에선 사실 별다른 역할을 해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기대야 하는 것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조차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인듯 싶다. 그걸 무어라 불러도 좋다. 그 감정은 조용한 밤에 가만히 촛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밤하늘의 광활한 별자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몸이 몹시 아파 누워 있을 때, 차분한 사랑 노래를 듣고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무척 작고 하찮으며 그간 사소한 것에 매달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정확히 칭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때 우리는 그 무적의 말, '너가 뭔데'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한 가지 경구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저도 당신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4.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위대한 과업, 그것은 서로의 부족함에서 단절이 아닌 유대감을 느끼는, 그 끝없는 연습의 노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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