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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 결론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5. 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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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글을 또 보게 되었다. 다도를 하고 숲을 거닐고 교양서적을 읽고 클래식과 포크송을 즐겨들으며 귀촌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적의를 매번 쉽게 드러내는 그의 글을 보고 있자면 그 놀라운 모순 때문에 온갖 생각에 빠지게 되곤 했다. 그는 자신이 고고하고 올바르고 예의바르나 불행하다고 믿었고, 그 이유를 우선적으로 잘못된 세상에서 찾았으며, 그 상황을 경멸어린 시선과 논조로 풀어내는 데 힘쓰곤 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비단 그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자화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난 그 불행한 모순을 설명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섯 시간 넘도록 고민하며 수십 문장을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그러나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어떻게 써봐도 설명만으로는 자체적 모순을 넘어설 수 없었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 자신의 문제부터 알아봐야 하는 상황에 자꾸 빠지게 되었고,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리한 답안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으나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답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어떤 태도를 완벽하게 설명하고자 할수록 난 내 자신과 교묘한 거래를 해야 했고, 그런 방식으로 이기려 드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이었다.  


노자는 도를 설명하려 할수록 도에서 멀어진다고 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설명이 아니라 묘사의 문제이며,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 결국 몇 시간 동안 썼던 모든 문장을 남김없이 지워버려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쓴다. 그 모순의 강렬함만 느꼈을 뿐, 그 해결책에 대해선 어떤 설명할 수 없었다고. 철학을 논리로 해결하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이 어째서 신비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될 것 같은 밤이다. 


"야심은 우리 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것을 깨끗이 벗어 던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 / 키케로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사상을 배격하는 자들까지도 그런 말을 써내는 그들의 책 겉장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 그들이 영광을 경멸했다는 것으로 영광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일들도 흥정 속에 들고 만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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