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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라는 대상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4. 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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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루미는 보통 탁자에 올라 발을 괴고는 엎드려 있다. 배고플 때 이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 며칠 전 별안간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고 한쪽 귀를 접으며 고개를 흔들더니 발작하듯 뛰어다녔다. 잠시 그러다 마는가 싶었는데 표정이 계속 좋지 않았고 어딘가 불편한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고개를 여러 번 흔드는 모양새를 보아 귀에 뭔가 이상이 있나 싶어 쳐다보았는데, 귓바퀴 안쪽으로 귀지처럼 보이는 갈색 이물질이 좀 있는 거 말고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설마 귀진드기가 재발한 건가? 하릴 없이 귀를 붙잡아 까고는 눈에 보이는 갈색 이물질을 모두 닦아 냈다. 어찌나 낑낑거리던지. 물티슈와 면봉으로 눈에 보이는 부분만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데도 루미는 칠색 팔색을 했다. 가까스로 닦아내고 놓아 주었는데 그 와중에 내 손가락에도 이물질이 적지 않게 묻어버렸다. 그렇게 낑낑대더니 그래도 닦기 전보다는 나아진 듯 곧 평안하게 드러누웠다. 역시 다시 잠을 잘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부엌에 놓여 있는 자신의 밥그릇을 건드리려는 모양새를 취하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몸을 비벼댔다.


이 동물의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는 먹는 일에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음식도 음식이지만 음식을 담는 그릇에 내 관심이 쏠렸다. 기존에 있던 루미의 밥통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재질은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그릇의 높이가 낮아 (루미가 실제로 불편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음식을 먹는데 불편해 보였고, 그릇이 가벼워 루미가 밥통을 발로 차면 자꾸 물이 옆으로 흘러내렸으며, 무엇보다도 플라스틱 그릇에 밥을 주는 게 무언가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루미를 위한 적당한 그릇을 고민하던 차에 아내가 루미의 밥그릇과 거치대를 마련해 왔다. 다이소에서 스테인리스 그릇을 구매한 뒤 그 크기에 맞춰 거치대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릇이 분리되어 있어 씻기에 편리했고, 거치대가 묵직하여 루미가 그릇을 쉽게 쳐내지 못했다. 그릇 높이도 적당해 보였다. 그릇과 거치대가 그럴싸해지니 루미가 받는 대우도 그만큼 격이 높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일찍이 플루타르코스는 사람들의 마음에 적당하게 맺어질 상대가 없기 때문에 강아지나 원숭이라도 키워 자신의 마음이 맺어질 부질없는 대상을 만든다고 썼고, 몽테뉴는 경치를 아름답게 보려면 눈이 막연히 공중을 방황하며 퍼지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 목표가 있어서 시선을 지탱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나의 눈은 루미에게 가 있고, 그 주위로 다른 전경이 흐릿하게 퍼져 있다. 나의 눈은 이곳을 향하고 때론 저곳을 향하기도 하며 맺어질 다음 상대를 찾거나 혹은 대신한다. 이 모든 게 부질없는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음 속엔 맺어지고 싶은 상대가 많고, 난 이 많은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시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어떤 풍성한 경치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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