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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피상성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3. 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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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계에서 외부로부터 내부를 가르고 규정짓는 공간이 문이라면, 네트워크 세계에선 그 공간을 컴퓨터라는 단말기가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문을 열고 외부로 향하듯, 우리는 컴퓨터를 켜고 외부의 네트워크를 활보한다.


사람들이 밖을 활보하며 다닐 때,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입을 열기 전엔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파악할 수 없을 거라 믿는다. 자신의 진실된 모습은 모두 내부에, 자신의 집 안에 있으며 자기 스스로 드러낼 때만 보여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입고 다니는 차림새, 이동하는 동선, 주로 이용하는 교통편, 움직이는 시간대, 자주 찾아가는 곳, 물건을 고르는 방식 등 여러 가지를 통해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 부류의 사람인지를 외부에 드러내고 있다. 그를 관찰하는 사람이 그런 관찰에 특화된 사람(탐정 같은)이라면 그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은 네트워크 세계에서도 똑같이 통용된다. "난 이 컴퓨터로 금융 거래를 하지 않아. 그냥 인터넷으로 검색만 할 뿐이지. 해커들은 내게서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어." 사람들은 그런 믿음으로 컴퓨터를 켠 뒤 네트워크에 진입한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된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시간대, 자주 가는 웹사이트, 그 사이트에서 자주 보는 글, 유머, 그 사이트에서 머무는 시간, 쇼핑 시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 결제 방식... 그리고 탐정이 같은 장면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듯, 해커는 패킷에서 더 많은 정보를 끄집어 낸다.


외부 세계에서 나를 파악하려면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관찰자(탐정, 염탐꾼, 해결사)가 필요하듯, 네트워크 세계에서도 나를 파악하기 위해선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관찰자, 즉 해커가 필요하다. 난 내가 컴퓨터 보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관련 지식이 있고 또 경계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관찰자가 내 컴퓨터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내 컴퓨터에서 내 명령 없이, 내 인지 없이, 백신을 피해 돌아가고 있던, 관찰차를 포함한 여러 가지 프로세스들을 강제로 제거해야만 했다. 그 목록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웹하드 서비스를 이용하다보면 필수적으로 설치되며, 그 이후에 웹하드 이용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특정 서버와 통신하고 내부 소스를 사용하는 v_service 프로세스

2. 쇼핑몰 이용 시 ISP 인증이 끝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컴퓨터 메모리에 상주하는 VPWalletService 프로세스

3. 사용자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을 사용자 정보와 함께 특정 서버로 전송하는 AdvTCApp 프로세스

4. 네이버 미디어 플레이어로 ndv 파일을 실행하면 자동으로 실행되며 그 후에도 계속 메모리에 상주하는 TUCTLSystem 프로세스

5. 설치 사실을 고지받은 적이 없는데도 컴퓨터 부팅 시 자동으로 실행되고 있던 기타 여러 프로세스들


이런 관리는 관련 기술을 아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술과 영역은 분화를 거듭해 너무나도 거대해졌고, 그리하여 혼자 힘으로는 따라잡기가 실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전문가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네트워크 속 세계는 속도뿐만 아니라 그 방대함 때문에 자동화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단말 계층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역할이란 자동화의 on/off에서 머물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무엇이 나쁜 프로세스인지, 이것이 왜 필요하고 저것은 왜 필요하지 않은지 모두 파악하기 어렵게 된 세상은 이것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0과 1이라는 단순성의 문제로 남게 되었고, 그리하여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그 세상은 대중들 앞에 피상성을 띠며 그들을 관찰자가 아닌 일방적인 행위자로 머무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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